영화, MKT

[리뷰/영화] 반두비(2009) - 기호에 폭력당하는 외국인 노동자

SGZ 2014. 4. 9. 03:16

 

 

 

     생각 없이 마냥 재미있게만 볼 수 있었던 영화는 아니었다. 나도 이 사회의 일원으로, 혹은 (주로) 다수자로 사는 사람이다. 때문에 ‘이런것이 올바른 것이다’ 라는 사회적 합의 밖에 있는 소수자들을 그려낸 영화를 보면서 은연중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부당함들이 적극적으로 그려져서 더더욱 불편했다. 일단 보기 싫어 덮어놓은 문제를 들춰낸 느낌이랄까. 

    지금도 그들은 그러한 부당함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이럴 때 나는 무기력함을 느끼고는 한다.

 

<강제로 무기력해지는 이들>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쉽게 말해 ‘진상’ 이다. 딸에게 못보일 꼴을 보이는 엄마부터, 퇴폐업소에서 제자를 만나는 선생님까지. 영화를 보다 보면 감정이입이 되어버려 주인공이 할 말은 하는 당찬 고등학생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동시에 개념도, 버릇도 없는 문제아 고등학생임에도 분명하다. 물론 영화도 극이기에 상대적으로 별난 캐릭터들을 모아놓은 것이겠지만, 찾아보면 그러한 군상들은 우리 주위에 있을법한 군상들이다.

     이러한 ‘진상’ 들 속에서 가장 정상적인 인물은 바로 외국인 노동자 ‘카림’ 이다. 임금 체불로 돈을 받지 못하고 본국으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 카림은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전에 일했던 공장의 사장을 찾아나선다. ‘일을 한 것에 대해 임금을 받는다.’ 당연한 것을 카림은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나 계속 장벽에 부딫친다. 자본주의 국가, 단일 민족 국가인 한국에서, 검은 사람이자 (돈도 능력도) 없는 사람인 카림은 강제로 무기력해 진다.

     제정신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카림은 우리의 삶 속에 이미 구조화 되어 있는 수목적 구조 속에서 타인의 시선에 의해 위치 지어진다. ‘외국인 노동자’ 라는 기호를 통해 자연스럽게 수직적 구조 위 어떤 위치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수목적, 수직적 구조 속에서도 카림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어찌 생각하면 이를 카림이 수목적 구조 속에서 리좀적 구조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수목, 리좀을 떠나서 카림이 전 사장, 혹은 우리 사회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카림’ 과 대비되는 인물로 백인 영어선생이 나온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명백히 드러나서 조금 민망했달까. 그런 만큼 메시지는 분명했다. 카림 역시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영어가 능통하다. 아마 주인공이 영어를 배우고 싶었으면 카림에게도 배울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러한 점은 전혀 부각되지 않는다. 우리는 카림에게서 ‘영어’ 를 보기 전에 ‘외국인 노동자’ 라는 기호를 먼저 보기 때문이다. 특정 기호를 특정 방식으로 해석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현실을 온전히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소수자는 그러한 기호에 의해 보호받기 보다는 폭력당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카림을 돕는 사람으로 민서가 있다. 민서 역시 여자라는 입장과 고등학생이라는 점에서 수목 구조의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카림과 다른 점은, 카림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수목 구조를 파괴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학교 선생님의 비밀을 알게 되거나, 차를 끌고 카림과 바다를 보러 가거나, 임금체불한 사장의 집을 찾아가서 난장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묘한 쾌감을 느낀다. 사실 따져보면 부도덕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수목 구조가 전복되는 상황 속에서 어떤 대리만족의 해방감을 느끼는 것을 보면, 우리 대다수는 어떤 의미에서 수목적 기호체계에 억압되어 사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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