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MKT

<호텔 르완다> 감상문 - 공포스러운 인간의 본성, 그리고 한 줄기의 희망.

SGZ 2014. 1. 25. 17:40




    실화는 실화만의 특별한 힘이 있다. 요전에 <머신건 프리처> 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인간 말종이었던 주인공이 아프리카 수단의 내전을 겪는 아이들을 돕는 목회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다. 영화 자체만 보면 그렇게 좋은 영화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악인이었던 주인공이 남을 돕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이야기의 ‘현실 속 있음직함’, 우리는 그것을 ‘핍진성’ 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핍진성을 무시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실화’ 라는 것이다. 실제 있었던 일을 그려낸 영화라면 핍진성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호텔 르완다> 역시 그러했다. 이웃이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가족만을 챙기던 주인공 폴 루세사바기나. 그러나 결국 그는 호텔의 모든 사람들을 지키는 사람으로 거듭난다. 주인공의 조금은 갑작스러운 변화가 납득이 안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기에 ‘핍진성’ 혹은 ‘개연성’ 따위를 상대적으로 덜 따져 가면서 볼 수 있었다.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한 백인이 호텔 바에서 투치족과 후투족 대립의 역사적 배경을 듣는 영화 초중반부의 장면을 꼽겠다. 이 장면은 감독이 다분히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성을 가지고 넣은 장면이라고 판단된다. 한 백인이 투치족과 후투족의 차이를 묻자 흑인은 외형적인 차이를 말한다. 투치족은 코가 크고 후투족은 코가 어떻고 하는 식의 설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백인의 눈에 그들은 단지 똑같은 ‘흑인’ 일 뿐이다. 설명을 듣고도 바로 옆의 여자들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게 백인의 눈에는 다 똑같은 흑인일 뿐이지만, 그들은 파를 나누고 서로를 죽일 각오로 싸운다.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그렇게 ‘우리’ 와 ‘타자’ 를 편가르고 싸우는 동물인가 싶다. 여기서 더 아이러니한 점은 그들이 사실 백인에 의해서 나눠지고 싸움붙여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백인에 화살을 돌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짜여진 프레임 안에서 서로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사실 인종적으로 따지자면 백인보다는 서로가 더욱 가까운 동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들이 분노해야 할 대상은 정치적인 이유로 동족간에 분노의 불씨를 지펴놓은 백인이다. 그러나 교육 때문인지, 프레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인지, 그들은 서로가 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아프리카의 비극의 불씨를 놓은 백인들이지만, 사태가 이렇게 되자 가장 빠르게 발을 빼는 것 역시 그들이었다. 백인들이 지펴놓은 불씨에, 타죽어 가는 것은 아프리카 흑인들, 특히 힘없는 여성들과 아이들이었다. 주인공인 폴 루세사바기나는 백인 사회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 연줄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것을 믿었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이 급박해지고, 본인들에게 손해가 올 것 같은 상황이 오자 백인들은 빠르게 빠져나간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남은 것은 ‘흑인’ 이라는 낙인 뿐이었다. 결국 흑인은 흑인이고, 백인은 백인이다. 백인에 가까운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주인공이지만, 선천적인 검은 피부라는 차이는 절대 극복해낼 수 없다. 

 전쟁터라는 지옥에 인간적인 연민, 혹은 우정 따위는 없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딱 한번 백인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기억난다. 절체절명의 위기였을 때 프랑스 본사에 연락을 해서 가까스로 반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 역시 인도주의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손익이 계산된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한 것일 뿐이었다. 본인들 소유의 호텔 체인에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는 것을 프랑스인들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마 호텔에 사람들이 아니라 돈이 있었다면 오히려 호텔이 더 잘 지켜졌을 것이다. 착잡한 기분이 든다. 

    누가 어떻게 갈라놓은 것이던 간에 편을 갈라 놓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해치려는 인간의 잔혹함, 그리고 철저한 손익계산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인간의 이기심은 참으로 공포스럽다. 그것에 더불어 나는 ‘무관심’ 을 영화에서 표현된 인간의 공포스러운 것으로 짚고 넘어가고 싶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영화에서는 현장의 잔혹함을 알리려 노력하던 저널리스트의 모습과, 그의 좌절이 표현된다. 주인공은 이 현장의 잔혹상을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리면 도움의 손길들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염세적이지만 또한 현실적인 저널리스트는 주인공에게 일침을 놓는다. 세상의 사람들은 그 소식을 접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저녁식사를 이어 나갈 것이라고. 뜨끔하면서 정확한 표현이다. 나 역시 여덟시 뉴스에 아프리카의 잔혹한 참사가 벌어졌다는 보도가 나오더라도 그것을 보면서 아마 큰 동요 없이 저녁밥을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TV스크린을 통해 벌어지는 세계는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인것 같다. 지구의 어느 곳이 아니라, 스크린 속의 가상현실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감독 역시 이 책을 읽고 그러한 장면을 넣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유명한 사진 작가인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 이라는 책에서 동정해야 할 것에 동정하지 못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분석한다. 그녀의 진단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Compassion fatigue(동정 피로)’ 를 겪고있다. 넘쳐나는 폭력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의 반복적 노출로 우리들은 진정 동정해야 할 것들에 무덤덤해져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 무관심해지고 있다. 그리고 무관심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방관하게 만든다. 관심을 가짐으로써 행동을 하게 되고, 그 행동으로 인해 그러한 비극들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라면, 상대적인 의미에서 결국 무관심은 비극들을 키우는 것이다.

    <호텔 르완다> 는 무엇보다 나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해보게 하는 영화였다. 같은 인간이 편을 갈라 백만명을 죽였고, 편을 갈라놓은 자들은 이익을 취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잽싸게 발을 뺐다. 그리고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이것은 실화로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러한 모습들이 내가 <호텔 르완다> 를 통해 파악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 와중에 한줄기 희망이 있다면 역시 약자들 모두를 책임지려는 주인공의 모습이었달까. 그러나 권력과 이권이 오가는 틈바구니에서 자신과 약자들을 지키려는 주인공의 모습은 너무 힘에 겨워 보였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돈과 권력보다, 옳은 것을 지키는 것이 더욱 쉬운 세상이 올 것인가. 그래도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은,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그러한 모습이 있다는 것이 아닐런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고 싶다. <호텔 르완다> 는 실제로 존재했던 그런 인간상을 그려냈다는 것 만으로도 의미있는 영화일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