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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장고:분노의 추적자(Django Unchained, 2012) - 프레이밍으로 본

SGZ 2014. 4. 9. 02:25

 

    영화는 ‘장고’ 라는 흑인 노예가 독일인 현상금 사냥꾼을 만나서 아내를 되찾으러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다룬다.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표현할 때 흔히 사용되는 ‘B급 감성’ 이라는 말에 걸맞게, 생각없이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즐길만한 영화였다.

    그러한 와중에도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히 드러나는 의미심장한 씬이 있었다. 바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의 캘빈 캔디가 장고와 슐츠 박사의 속셈을 눈치채고 미묘한 긴장 속에서 그들을 위협하는 씬이다.

 

 

<프레이밍의 힘>

    플랜테이션의 귀족으로 자란 캘빈 캔디는 말한다. “흑인들은 왜 우리 백인들을 죽이지 않는가?”  캔디의 아버지의 면도를 담당한 흑인 ‘벤’ 이 마음만 먹었다면 주인을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 프레임을 통해 보는 세상이 곧 현실이다. 평등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에게 벤의 순종은 이상한 일일 수 있으나, ‘평등’ 이라는 프레임을 접해볼 수 조차 없었던 벤에게 ‘흑인의 백인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사실 캔디 역시 영화 속 캐릭터이기에 그러한 의문을 갖는 것이지, 실제 그 시대를 살던 백인들은 그러한 의문조차 가지지 못했으리라.

    캔디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러한 프레이밍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보이는 ‘지식’ 으로 승화되는지 까지 암시한다. 캔디는 벤의 두개골을 쪼갠다. 그리고 세 개의 홈을 짚으며, 골상학적으로 흑인에게는 ‘노예근성’ 이 있다고 설명한다. 재미있는 점은 “뉴턴이나 갈릴레오의 머리에 이러한 홈이 있었다면, 그것은 창조성과 관련있는 것일 것이다” 라고 덧붙이는 부분이다. 주입된 지식, 형성된 사고의 프레임은 그렇게 객관적으로 보이는 ‘지식’ 이 된다. 흑인은 ‘학문적으로’ 천성이 노예가 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논리이지만, 무서운 것은 과거 한 때 골상학이 정말 ‘과학’ 으로써 인정받은 시절이 있었다는 점이다.

    개념적으로 이러한 과정들을 설명하면, 그 당시 흑인에 대한 담론(Discourse)은 큰 이견 없이 ‘노예’ 로 수렴됐고, 그 강력한 담론은 규범화(Normalization)를 통해 강화되어 반 강제성을 띤다. 그리고 그 Normalization 된 Normal 의 범주 밖 존재들은 소수로서 일종의 ‘반동분자’ 가 된다. ‘흑인’ 으로 낙인 찍혀진(이름 붙여진) 장고가 말을 타는 것 만으로도, 술집에 들어오는 것 만으로도 한바탕 사단이 일어나듯이 말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뉘앙스만 보면 프레임, 규범화와 같은 언어들에 부정적인 어감이 담긴 것 같지만, 한가지 인정해야 할 사실은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통하지 않고 세상을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프레임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 담론을 형성하고, 규범화하고 또 이름붙인다. 다만 한가지 무서운 것은 그 프레임 속에 갇히면, 그 프레임 속에 갇혀 있다는 것 조차 모른 채 독단에 빠진다는 것이다. 100년 쯤 후의 인간이 보기에는, 현대인 역시 어떤 왜곡된 프레임에 갖혀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주류 담론에서 벗어난 것일지라도 소수로 치부하기 보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려 노력하는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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