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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American History X(아메리칸 히스토리 X) - 당신이 하는 행동들은 당신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 있습니까?

SGZ 2013. 1. 10. 03:13



     포스터는 영화를 지면 한장으로 대변하는 광고물입니다. 물론 광고물의 본질은 매출의 증가인 만큼, 사람들의 발길을 영화관으로 끄는것이 가장 우선되는 목표겠죠. 그러나 광고라는 것이 그렇듯, "포장" 에 그쳐야 하는 것이지 내용을 "왜곡" 하면 옳지 않습니다. "과장" 은 테크닉이지만, "기만" 은 반칙입니다. 그런 점에서 참 잘못 만들어진 포스터입니다. 마치 끝내주게 잔인한 액션이라도 보여줄 태세입니다. 혹 그러한 기대를 하신다면, 다른 영화를 보시길!



(정작 진정 그러한 영화도 이 정도인데 말입니다.)


     유혈이 낭자한 비릿한 영화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영화는 '미움' 의 감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찬찬히 생각할 꺼리를 던져줍니다. '폭력', 혹은 '인종 차별' 은 장치일 뿐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닙니다. 감독이 이 장치들을 통해 던지고 싶은 진짜 화두는 바로 '미움'의 감정, 그리고 '삶의 의미' 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간의 감정은 항상 이성을 앞질러 갑니다. 상황을 생각해 보기 전에 화부터 나는 것이 사람이고, 감정에 휩쓸려 저지르고 난 후에 후회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주인공인 데렉 빈야드는 그러한 과정을 밟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아예 모르는 것보다, 어설프게 아는 것이 더욱 위험하다.

     데렉이라는 인물은 총명한 인물입니다. 다른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헛소리를 지껄일때, 그는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심지어 일면 멋져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파고 들어가 보면 그 논리는 모두 '증오' 와 '미움' 에 기반합니다. 그 뿌리에는 증오와 미움 뿐 다른 어떤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고, 또 더욱 무섭습니다. 훌륭한 이성을 잠식한 분노는 그 파괴적인 힘을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합니다. 가슴팍에 새긴 데렉의 나치 문신처럼, 그의 모습은 나치즘의 분신입니다. 나치가 어떻게 그렇게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또 잔인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데렉의 모습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개똥철학은 단순한 무식함 보다 오히려 두려운 결과를 낳습니다.



무엇을 위한 분노인가

     그러한 데렉은 교도소에 가면서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흑인과 함께 웃으며 교감하고, 되려 흑인보다 훨씬 야만적인 백인들을 접합니다. 결국 자신의 분노에 정당성을 부여하던 흑인의 열등함은 사실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열등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증오의 뿌리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차차 인식합니다. 그리고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러한 상태의 데렉에게, 비슷한 과정을 이미 겪은 흑인 교장 선생은 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던 때가 있었지.
나와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책임을 말이야.
모두의 탓으로 돌렸어. 백인들, 사회 하느님까지.
난 해답을 못 찾았어. 질문이 틀렸으니까.
올바른 질문을 해야 돼.

예를 들면요?

"네가 했던 행동들이 네 삶을 더 낫게 만들었니?" 


이 질문을 듣고 데렉은 눈물을 터트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결국은 흑인에 대한 분노도, 폭력도 다 그저 '잘 살기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어떻게든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데렉의 경우, 그 표출이 흑인에 대한 분노와 폭력이었으며, 살기 위한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좀먹는 것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데렉은 눈물을 흘리고 구원의 손을 내밉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교장 선생이 데렉에게 던지는 과거형 질문이 아닙니다. 감독이 관객에게 묻는 현재형 질문입니다. "당신이 하는 행동들은 당신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 있습니까?" 이것이 이 영화가 전달하고픈 궁극적 메시지의 한줄 요약입니다.



너는 해야 한다, 이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대항하여 "나는 원한다." 라고 말한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의미심장한 부분은 영화의 말미에 삽입된 데렉 가족의 식사 장면에 있습니다. 그 장면을 통해 데렉의 아버지가 인종차별 주의자였음이 드러납니다. 식사 자리에서, 데렉의 아버지는 아직 순수했던 데렉에게 인종차별주의적 사상을 심습니다. 죽기 전에 데렉의 분노가 유색인종 혐오로 향할 수 있도록 물길을 터 놓았던 것입니다(!). 감독은 이 장면을 제시함으로써 주인공이 어째서 백인우월주의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내러티브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자의와 타의에 대해 생각할 거리까지 제공합니다. 요즘 읽는 책의 관련 구절이 떠올라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中
  너는 해야 한다, 이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대항하여 "나는 원한다." 라고 말한다.  (중략)
  천 년 묵은 가치가 이 비늘들에서 빛난다. 그리하여 모든 용들 가운데서 가장 힘센 용이 말한다. "사물들의 모든 가치, 그것은 나에게서 빛난다." 라고. (중략)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획득. 이것은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니체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철학을 이렇게 시적으로 풀어 쓸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니체는 기성의 가치체계를 '거대한 용' 에 비유하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획득을 '사자의 힘' 에 비유합니다.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데렉은 거대한 용에 무릎 꿇은 것입니다.
데렉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남기고 간 '해야 한다' 를 철저히 지킨 것입니다.
데렉은 주어진 가치를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무릇 니체의 인간이라면 거대한 용과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기존의 가치체계를 부정하고 자유를 통해 자신의 가치체계를 성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독이 이런 장면을 영화의 중요한 마무리에 삽입한 것은, 타인 혹은 사회의 선입견이나 가치체계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결국 큰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려 했던 것은 아닐런지. 


생각할 거리도 있으면서 너무 무겁거나 심오하지 않아 더욱 좋은 영화였습니다.

다시한번 곱씹어 봅니다.


"당신이 하는 행동들은 당신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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