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둔 노교수의 말.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이라는 비슷한 책도 읽었던 것 같은데, 구체적인 내용은 생각이 잘 안난다. 그래도 머리속 어딘가에 남아있겠지. 죽음을 앞둔 노인의 말은 묘한 무게가 있다. 죽음을 앞두고 있기에 가장 솔직하고, 오래 살아온 사람이기에 삶의 정수가 담겨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흔히 나이들면 머리가 굳는다고 한다. 내 어렸을적, 아버지는 어렸을때 뭔가가 고장나면 뚝딱 고치시는 분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70에 가까운 나이가 되신 지금은 내가 보기에 별 것 아닌 일도 쉬 해내지 못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가끔은 작은 두려움을 느낀다. 나의 미래, '나도 어쩔 수 없이 머리가 둔해지는 순간이 오면 어쩌지, 세상이 내 머리를 앞질러 가는 순간이 오면 어쩌지' 라는 생각. 그러나 이어령 교수의 머리는 늙지않고, 죽는 순간까지 말랑한 머리를 가지고 가신 분 이었나보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시대의 구루. 자주 쓰는 칼은 무뎌지지 않는다.
삶과 죽음, 인간의 기원과 같은 어려운 얘기를 하지만, 누가 될지 모르는 독자를 배려하며 이야기하는 노교수 때문인지 술술 읽히는 책이다. 인터뷰어 였던 저자의 필력도 상당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정말 밝은 햇살 비치는, 나무 향이 날 것만 같은 노교수의 서재에서 이야기를 듣는 기분. 결국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죽음이며, 그 죽음을 통해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매번 강조해도 부족하지만, 죽음은 우리의 옆에 항상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을 다르게 보낼 수 있다. '죽음을 항상 생각하라' 라는 말은 자칫 시니컬해 보이기도 하지만, 삶의 진실은 거기에 있다. 결국 모든것은 개인이 나고 죽는 이야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이라이트
-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 되는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어. 그래서 나는 금수저 흙수저 논쟁을 좋아하지 않아. '노력해봐야 소용없다' 는 자조를 경계해야 하네.
- 법으로 보면 소설이 가소롭겠지만, 소설계에서 보면 법이야말로 웃기는 말장난이야. 소설이 진리에 더 가깝지.
- 타성에 의한 움직임은 언젠가는 멈출 수밖에 없다고. 작더라도 바람개비처럼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자기만의 동력을 가지도록 하게.
-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 세례 받으면 천국 간다고 믿고 평화 속에 산 중세의 인간이 행복한 건지, 눈 뜨고 개인의 자아를 향해서 끝없이 회의하고 투쟁한 대낮의 인간, enlightment를 지난 오늘의 우리가 행복한 건지, 나는 아직 모른다네.
- 생명이든 문명이든 지구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약속이나 한 듯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지. 우리는 거기에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맞춰서 흔들거리고 있는지도 몰라.
- 큰 얘기들은 다 똑같아. 큰 얘기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었다' 가 전부야. 큰 이야기를 하면 틀린 말이 없어. 지루하지. 차이는 작은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거든.
- 극한에 몰리지 않으면 인간은 모르는 거라네. 수용소에 와서 비로소 인간의 민낯을 본 거지. 보통 때는 감추고 살아. 자기도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 걸세. 불이 나봐야 알고, 홍수가 나봐야 알고, 코로나가 덮쳐와야 아는 거야.
- 유물론으로 가다 보면 결과적으로 로봇과 인간은 다르지 않아. 마음도 화학물질론이 되니, 그런식이면 로봇 하나 사면 되는거지. 과학의 실수가 거기에 있네.
- 과학과 예술이 대립하는 이유는 분명해. 과학은 모든 것을 '비인간'으로 가정하고, 예술은 모든 것을 '인간'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라네.
- 럭셔리한 삶......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 럭셔리지
- 돈을 받는 노동이라도 자기 생각이 들어가 있고 자기만의 성취와 기준이 있어. 그때 비로소 '그림자 노동'에서 벗어나는 거야. 예술가가 되는 거야. 노동을 하는 순간에도 예술을 하고 있는 거야.
- 일사불란하게 투표하고 통제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 미국 보고 엉망이라고 하는데, 괜한 걱정이야. 그 '엉망진창'이 어마어마한 힘이라네.
-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의 후손 중 많은 사람이 폐쇄공포증을 앓았어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유전은 내 조상의 정확한 이력서에요.
- 우리는 마르크스의 상품경제 시대에서 멀리 왔어요. AI시대엔 생산량이 이미 오버야. 물질이 자본이던 시대는 물 건너갔어요. 공감이 가장 큰 자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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