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서평] 이진숙 저 -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 그림과 함께 온전한 내가 될 때] - 미술사와 시대의 흐름

SGZ 2023. 4. 17. 00:57

 

카지미르 말레비치 - [나쁜 예감]을 예쁘게 활용한 표지
 

  하이라이트라고 옮겨 적다보니 이게 하이라이트가 맞나 싶을정도로 줄친 부분이 많아서, 새삼 아아, 좋은 책이었구나 싶다.

  세상에 좋은 미술작품에 대한 정보는 넘쳐나지만, 그 미술작품들이 왜 위대한지, 시대적으로 어떤 의미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 책은 근대 화가들을 화가별로 한명씩 소개하며 관련된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풀어놓는다. 작가가 참 내공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드는게, 단순히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화가의 삶부터, 시대적인 배경까지 요리조리 잘 버무려서 글을 읽는 맛이 났다. 갬성돋는(?) 작가님의 에세이 같은 내용은 덤. 우열을 나누려는건 아니지만 이전에 읽은 최태성 선생님이 쓰신 책과 비교 되었달까. 하필 바로 이전에 읽어서…^^; 여하튼 꽤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

  기대보다 더 좋아서 같은 작가님이 쓴 이전 시대 화가들을 다룬 책도 읽어볼까 싶다. 미술에 관심은 있는데 아직 잘 모르고, 더 알고싶은 사람들이 읽으면 참 좋을만한 책이다.

 

하이라이트
- 당연히 각각의 그림 속에는 그림이 탄생하던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다 보니 미술관에는 종종 성차별, 인종차별, 오리엔탈리즘 등의 낡은 시대의 오도된 관념을 심어주는 ‘멋있는’ 이미지들이 걸려 있기도 하다.

- 근대사회로 들어서면서 인간은 신분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개인이 되었다. 개인은 자신이 무엇이 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정할 수 있었고 정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옳은지 안다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개인은 ‘자유롭지만 고독한’ 존재가 된다.

- 이들의 목표는 말 그대로 라파엘 산치오 이전, 즉 중세와 르네상스 초기 시대로 미술사의 시곗바늘을 돌리자는 것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라파엘로와 그 이후에 등장한 미술작품은 너무나 완벽한데, 이 완벽함은 결국 미술작품을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기교적으로 만들어서 그 본연의 순수함과 진실함을 잃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 유대 전승에 따르면 릴리트는 아담과 이혼한 전처다. 아담이 힘으로 그녀를 쓰러뜨리고 남성 상위의 체위를 요구하자,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에덴동산을 떠나 홍해로 가버렸다.

- “그래,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모두 죽어가지 싶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902년 처음 파리에 왔을 때의 소감을 '말테의 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 그중 하나가 제목만으로도 너무 따뜻한 밀레의 <첫걸음>이다. 아빠가 한참 일하고 있는 텃밭에 엄마가 아기를 데리고 나온다. 아기가 첫걸음을 뗀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만세하듯 팔을 벌리고 기뻐하며 아빠는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를 환호한다. 왜 농사짓고, 왜 이 고된 삶을 견뎌야 하는지가 이 한 장면으로 바로 설명된다.

-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내세를 의심할 때 인류는 불멸이 아니라 세속의 행복을 좇게 된다” 라고 지적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무신론은 이미 공공연해지기 시작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무신론보다 더 종교를 약화시킨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이었다. 이제 부자들은 오르가스 백작처럼 전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는 대신 재단을 만들어 관리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죽어도 돈은 살아서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할 것이다.

-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는 것, 남과 다르다는 것, 개성이 강하다는 것은 이제 예술가들에게 최고의 칭찬이 됐다. 이전 시대에 개성이 강하다는 말은 회화의 보편적인 법칙에 어긋났다는 부정적인 의미였다. 개성이 강하다는 말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은 더 이상 위대한 영웅이 아닌 평범한 개인이 예술작품의 주인공이 됐기 때문이다.

- ‘권태’라는 책에서 피터 투이는 권태라는 감정이 “근대의 산물” 이라고 말한다. 삶은 견딜수 없는 진부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모네의 ‘수련’ 연작에는 서구문화의 근간이 되어온 이분법이 사라진 것이다.

- 클로딘 사게에 따르면 ‘코르셋의 착용은 사회적 규약을 준수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 을 의미한다. 즉, 코르셋의 착용은 보여주기 품평당하는 여성의 지위를 감내한다는 말이다.

- 일직이 개항한 일본의 목판화인 우키요에는 유럽의 젊은 작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세계를 바라보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겨졌던 원근법이 없어도 그림이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체험한 것이다.

- 흥미롭게도 20세기 초반 추상화가 등장하는 시기는 아널드 쇤베르크가 등장해서 무조 음악을 할 때와 일치한다.

- 지금까지 예술은 자연과 인생을 모방했다. 그러나 탐미주의 시대로 오면 인생이 예술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철저히 자연과 거리가 먼 것으로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것을 추구하는 아르누보의 취향이 주류가 되고 있었다.

- 세잔은 진정 내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았다. 단조롭고 자신의 과제에 집중하는 삶. 세잔은 아침 일찍 일어나 여섯 시부터 열 시 반까지 아틀리에서 일하고 나서 점심을 먹고 오후 다섯시까지 야외에서 작업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식사를 하고 그림을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 흔히 반 고흐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도 예술을 위한 열정을 불태우다 광기에 빠져 자살한 천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 목표는 절대 고독과 예술을 위한 순교가 아니었다. 그는 “음악처럼 사람을 위로해주는 무엇을 말하는”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이 잘 팔려 헌신적인 동생 테오에게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원했다. 모두가 거창한 무언가를 꿈꾸던 시대에, 평범한 사람들의 위로를 말한다는 것은 거꾸로 매우 비범한 태도였다.

-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19세기 후반 문화 전반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됐던 것이 창녀의 삶이었다.

- 전시를 몇 시간 동안 꼼꼼히 살펴본 수잔 발라동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신이 나를 프랑스의 최고의 여성 화가로 만든 것 같아.” 이 말이 옳은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엄마, 많은 사랑을 했지만 결국 혼자된 여자, 성공한 화가 등 그녀에게는 여러 자아가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슈퍼우먼은 환상이다. 수잔 발라동은 마지막 순간에 화가로서 자신을 설명했다. 화가로서라면 괜찮았다. 수잔 발라동이라는 긴 성장소설이 완결되는 순간이었다.

- 소비는 욕망의 대중화, 욕망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진정한 세속화의 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당시보다 더 젊었던 시절 파울라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고 일기에 썼다. 그러면서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 안에서 사랑이 한 번 피어나고 좋은 그림 세 점을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손에 꽃을 들고 머리에 꽃을 꽂고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나겠다”라고 덧붙였다.

- 아비샤이 마갈릿은 저서 ‘품위있는 사회’ 에서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욕’ 하지 않는 사회가 ‘품위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장애, 피부색, 성 정체성, 종교 등의 이유로 사회 구성원들이 모욕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품위 없는 사회’ 라는 뜻이다.

- 팜파탈이든 팜프라질이든 모두 남성을 기준에 둔 개념이다. 둘 다 남성의 생산력에 의존하는 여성이다. 그러나 전쟁은 남성의 통제 영역 밖으로 뛰쳐나가는 여성을 만들어냈다. 바로 일하는 여성이다.

- 1988년 10월 5일, 72세 김향안이 썼던 것처럼 “사람의 70대는 인간으로서 완성되어가는 시간이다. 여기에는 남녀도 빈부도 없다. 하나의 인간이 존재하다 소멸되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일흔한 살의 케테 콜비츠 자화상에도 여성의 특징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마지막 순간에 여자로 혹은 남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인간으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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