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리뷰/책추천] 힘들때 좋은 책. 진짜 힐링은 이런것. 피천득 - <인연>

SGZ 2013. 9. 18. 19:21



  책을 읽는다는 것의 장점은 수 없이 많겠지만, 그 중 중요한 하나는 손쉽게 간접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전달 받음으로서, 잠시나마 필자 혹은 책 속 가상의 인물이 되어볼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사실 나름 대단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강렬하고 묵직한 책보다는, 잔잔하고 경쾌한 책을 읽고 싶었다. 안그래도 피곤한 와중에 독서마저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은 정말 싫다. 그래서 딱딱해 보이는 <로지컬 싱킹>, 어두워 보이는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아무래도 심오할 수 밖에 없는 <철학의 뒤안길> 을 제치고 선택한 책이 이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 이었다. 수월하게 읽혔고 잘 한 선택인 것 같다.

  "난 요즘 넘쳐나는 '힐링' 이라는 것이 싫다. 너희같이 풍족한 환경에서 사는 놈들이 무슨 얼어죽을 힐링 타령이냐? 진짜 힐링이 필요한 사람들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고 말하신 어떤 선생님이 떠올라서, 또 이미 세속화된 말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한번 '힐링' 이라는 단어를 써 보고 싶다. 근거 없이 "너희는 잘 될꺼야!", 혹은 "너희가 잘못된 게 아니라, 이 사회가 문제야!" 라고 말하는 것은 힐링이라기 보다 대신 자위를 해주는 것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연> 에 '힐링' 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은 것은, 사소한 모든 것에 대한 필자의 사랑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소한 것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아무리 힘든 사람도 잠시 짬을 낸다면 맑은 가을 햇볕을 쬘 수 있을 것이고, 어느 길 가로수의 초록빛, 밤하늘 한두개의 별 쯤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다(이나마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슬퍼진다). 책을 읽는다는 것의 중요한 장점은 간접경험이라고 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그러한 작은 것들에서 행복을 느끼는 피 선생님이 잠시나마 되어볼 수 있었다. 


18p.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또는 사회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듯이' 수필은 씌어지는 것이다.

21p. 신문 3면에는 무서운 사건들이 실린다 하여 나는 너무 상심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대부분이 건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소설감이 되고 기사거리가 되는 것이다.

35p. 신록을 바라다 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43p. 참다운 여성의 미는 이른 봄 같은 맑고 맑은 생명력에서 오는 것이다.

109p. 유치원 시절에는 세상이 아름답고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차고, 사는 것이 참으로 기뻤다. 아깝고 찬란한 다시 못 올 시절이다.

137p.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207p. 아무리 슬픈 현실도 아픈 고생도 애 끓는 이별도 남에게는 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당사자들에게도 한낱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날의 일기도 훗날의 전기도 치열했던 전쟁도 유구한 역사도 다 이야기에 지나지 아니한다.

253p. 포숙이 관중을 이해하였듯이 친구를 믿어야 한다. 믿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 사람보다는 믿다가 속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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