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서평/책] 10년 만에 다시 만난 <그리스인 조르바>

SGZ 2023. 2. 28. 23:22

 

요즘은 디자인도 달라진 것 같던데...
 

 

<그리스인 조르바>는 대학 시절부터 참 좋아했던 책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을 고르라면 이 책을 고를 정도였달까요. 지금은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산다면 조르바처럼’ 따위의 짧은 메모를 적어 선물하기도 했었습니다(웃음). 아마 이 책을 처음 읽은 게 20대 초반이지 싶은데,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학 속의 멋진 인물을 꼽으라면 ‘조르바’가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면, 조르바가 대단히 인상 깊긴 깊었던 거죠.

이후 무려 서른* 살이 되어 조르바를 다시 만났습니다. 10년 전과 변함없이 조르바는 나를 매혹시켰습니다. 직설적이고, 명쾌하고, 무식하면서 유식하고, 남자다운 인물.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인간.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물. 조르바의 매력은 이성적인 판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장 육부로 느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성적인 계산이나 복잡한 알레고리 따위는 개나 주라지! 인간은 짐승이고, 이성이란 궁둥짝이고, 돈은 날개이고, 고추는 열쇠이고, 여자는 천국으로 가는 문이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얄루! - 이런 돌직구같은 주장을 읽다 보면 ‘이런 젠장, 우리 솔직해져 보자. 사실은 이게 정답이잖아!’ 싶은 부분들이 꽤나 있어버리는 겁니다. (물론 찬찬히 곱씹어보면 문제 있는 주장도 많긴 한 것 같습니다만… 특히 여성비하적인 부분은 여성분들이 읽을 때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더라고요)

다만 10년 전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었을 시절에는 ‘그래, 조르바처럼 사는 거야!’라며 인생의 기똥찬 멘토를 만난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나를 슬프게 하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463p. “……이해하고말고. 그래서 당신에겐 평화가 없는 거요. 이해하지 못하면 행복할텐데. 뭐가 부족해요? 젊겠다, 돈이 있겠다, 건강하겠다, 사람 좋겠다, 만고에 부족한게 없어요. 하나도 없지. 한 가지만 제외하고! 그게 없으면 두목, 글쎄요……”

……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조르바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의 울고 싶은 기분을 알 것 같았습니다. ‘조르바처럼 사는거야!’ 라고 생각했던 10년 전의 나는, 10년이 지나보니 조르바 보다는 펜대 운전수인 주인공이 되어있나 봅니다.

삼십대가 되어 사회속에서 어쩌면 자리를 잘 잡았지만, 무언가 나를 괴롭히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아마 한 회사의 대리보다는, 뭔가 좀 더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존재를 꿈꿨던 어릴적의 내가 저 깊은 마음속 어딘가에 여전히 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모든걸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기에는, (책의 표현을 빌어) 지금까지 길게 날려놓은 연이 너무도 소중한 것이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책에서 조르바적 삶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조르바를 통해 어떤 초인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주인공은 제나름의 삶을 살아갑니다. 마지막에 조르바가 녹암을 발견했다며 부를때도 주인공은 거절하고 맙니다. 그리고 조르바는 죽고, 주인공은 세상에 조르바를 남깁니다. 나름의 위대한 과업을 끝마치듯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되지만 화자인 주인공은 니코스 카잔차키스 본인입니다. 이 때가 젊었을 시절이라고 하니 20대에서 30대쯤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일흔 넷 쯤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마련해놓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이 묘비명을 보면 젊었을 때는 펜대 운전사였던 작가 역시 일흔 넷쯤 되니 조르바 만큼의 어떤 경지에 오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 역시 그정도 나이가 되면 어떤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심심한 자위를 해보면서… 조르바가 새파란 청년이 아니라 노인인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당장 조르바처럼 산다면 세상이 또 카오스가 되어버리지 않을까요? (웃음)

 

 

 

인용구 ///////////////////////////////

 

18p.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 인간의 이성이란 그거지 뭐.

25p.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35p. 그렇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때는 내 피가 뜨거웠어요. 도무지 ‘왜?’ 라든지 ‘어째서’ 같은 걸 생각해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사물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면 나남없이 나이 처먹어 분별이 좀 생기고 이빨도 좀 빠져야합니다. 이빨 하나 없는 늙은 이라면, ‘안 돼, 얘들아. 깨물면 못써’ 하고 소리치긴 쉽습니다. 그러나 이빨 서른 두 개가 말짱할 때는…… 사람이란 젊을 동안은 아주 야수 같은가봐요. 그래요, 두목, 사람 잡아먹는 야수 말이오!

39p. 이 개자식은 지갑을 꺼내어 터키 놈들에게서 빼앗은 금화를 주르륵 쏟아 내더니 한 주먹씩 공중으로 던지는 겁니다. 두목, 이제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81p.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

86p. “두목, 인간이란 짐승이에요” ……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104p.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159p. 산다는 것은…… 주목, 당신, 산다는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165p. 그는 안달을 내며 한몫 단단히 잡고 날개(그는 돈을 날개라고 불렀다)가 넉넉하게 커져 날아갈 날을 기다렸다.

349p. 그리스 인이든, 불가리아 인이든 터키 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 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서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419p.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며 우리 한순간의 목숨이 어떻게 하여 세상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 차원을 높여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449p.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463p. “……이해하고말고. 그래서 당신에겐 평화가 없는 거요. 이해하지 못하면 행복할텐데. 뭐가 부족해요? 젊겠다, 돈이 있겠다, 건강하겠다, 사람 좋겠다, 만고에 부족한게 없어요. 하나도 없지. 한 가지만 제외하고! 그게 없으면 두목, 글쎄요……”

……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조르바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거소가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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