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 그리고 문화 정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영화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중문화’ 라는 것에 의미 있는 어떤 것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일단 흥미와 재미가 전제되지 않은 영화는 나에게 좋은 영화가 아니었다. 큰 의미도 없을 텐데 일단 재미라도 있어야지. 때문에 과거의 내가 「바람난 가족」을 봤다면 아마 ‘4차원적 영화’, 혹은 ‘야한 영화’ 쯤으로 기억에 남았으리라. 「바람난 가족」은「하녀」임상수 감독의 2003년 작이다. 「하녀」를 분석하면서 생각 외로 많은 의미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때문에 임상수 감독을 다시 한 번 믿어보기로 하고, 그가 각본과 감독을 맡은 「바람난 가족」이라는 작품을 정했다. 그리고 지금, 역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녀」가 ‘계급’ 이라는 주제를 영화 속에 녹여내어 우리들에게 보여준 작품이라고 한다면, 「바람난 가족」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영화 속에 녹여낸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영화는 한 변호사 가족의 해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그 해체라는 사건을 단순히 영화 속의 픽션으로 본다면 그것은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 힘들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문화는 구조에 영향을 받는 우리 삶의 전반적 방식이며 또한 정서의 구조를 통한 의미화의 실천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문화 텍스트로써 우리들의 삶을 재현하며 또 의미화 실천을 통해 어떤 의미, 가치,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내포한다. 영화에 나타나는 가족은 겉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다. 변호사라는 좋은 직업의 가장, 취미생활로 춤을 즐기는 그의 부인, 입양되었지만 엄마의 사랑을 받는 아이, 그리고 할머니까지. 그러나 감독은 거기에 과감하게 성적 담론을 끌어들인다. ‘섹스’ 는 ‘가족’ 이라는 단어와 병치시키면 왜인지 모르게 거부감이 드는 단어이다. 그러나 그 빈틈을 고의적으로 공략하듯 영화는 자극적인 성적 담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노골적인 성적 묘사를 통해 감독은 지금까지 ‘가부장적, 가족적’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 바라봐 지던 가족을, 이제는 ‘개인의 행복과 만족’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관점을 통해서 한번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 결과, 가족의 멀쩡했던 겉보기와는 다르게 많은 문제점들이 관찰된다.
영화 속에 나타난 ‘바람난 가족’ 의 바람난 사람들은 남편 주영작(황정민 분), 그의 부인 은호정(문소리 분), 그리고 시어머니 홍병한(윤여정 분)의 총 세 명이다. 일단 영화 중반부에 해결되는 시어머니의 ‘바람’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극중 시어머니는 가족과 남편에게 자신을 희생한 우리네 시대의 전형적인 할머니, 혹은 어머니의 초상이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마자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폭탄선언을 한다. 심지어 15년 만에 섹스도 했고 생에 처음으로 오르가즘을 느꼈다고. 이상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에 따르면 남편이 죽은 부인은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또한 그녀는 담담하게 말한다 “난... 요즘에야 진짜 내가 어른이 된 기분이야...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그리고 지금이 아주 좋고 뿌듯하다고. 감독은 이러한 장면을 통해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의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 에서 벗어나서 ‘한 여자’ 로서의 어머니를 보게 한다. 이 맥락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한계지움’ 이자 ‘억압’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억압이 풀어 헤쳐진 지점에서, 우리의 어머니들이 ‘어머니’ 로 호명되기에 앞서 ‘인간’ 이자 ‘한 여자’ 로서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게 자식들과 이별하고 뒤늦은 사랑과 떠나는 그녀는 이 영화에서 단연 가장 행복해 보이는 인물이다.
감독은 이렇게 ‘가족’ 이라는 가치와 연결 짓기 꺼려지는 ‘성’ 이라는 가치를 개인의 ‘행복’ 과 연결시켜 놓고 남은 부부의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켜 나간다. 영작과 호정은 잠자리에서 서로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호정에게 영작은 “몸이니까 변하겠지” 라는 말밖에 해줄 말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영작은 가정에서 채워지지 않는 성적 욕구를 다른 곳에 가서 죄책감 없이 마음껏 발산한다는 것이다. 그는 성적으로 개방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를 만나면서 쌓인 욕구, 아니 그 이상으로 쾌락을 즐긴다. 반면 호정은 옆집의 고등학생을 만나기는 하지만 영화의 흐름 속에서 단순히 쾌락에 탐닉하는 모습은 아니다. 그러던 도중 영작은 내연녀와 관계를 가지고 오는 길에 차 사고를 당하게 되고, 그 결과 오토바이 운전사에게 원한을 사서 자식을 잃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바람’ 때문에 아이를 잃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서는 일말의 부끄러움이 보이지 않는다. 내연녀와 농밀한 내용의 전화 통화를 아내인 호정에게 들켰음에도 그는 당당하다. 아내가 고등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분노한 영작은 결국 호정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정작 그 시점까지 호정은 학생(봉태규 분)과 육체적 관계까지 가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사회의 모습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기혼 남성들은 자신의 외도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면서 아내의 외도에 대해서는 절대 관대하지 않다. 감독은 유독 영작과 내연녀의 자극적인 베드씬을 많이 배치해 놓았고, 영작과 호정의 몸싸움을 꽤나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그것을 통해 임상수 감독이 꼬집고, 들춰내고 싶었던 것은 우리나라 남성의 이중성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그럴 만 해 보였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명백히 부당한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보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과정 끝에 결국 호정은 고등학생과 관계를 하게 된다. 그 장면의 연출에서도 몇몇 주목할 만 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호정은 지금까지 무용실에서 무언가 겉도는 존재로 카메라에 나타났다. 여럿이 팀을 지어서 같은 동작을 연습할 때 호정은 항상 그 집단과는 조금 벗어난 곳에서 약간은 다른 안무를 하고 있었다. 반면 학생과의 베드씬에서는 자신이 무용실의 확실한 메인이 된다. 주변으로써 기능했던 여성이 이제는 중심으로 올라선 것이다. 또한 관계를 가질 때의 체위 역시 그렇다. 호정은 영작과의 관계에서는 남성상위로 수동적인 모습이었던 데에 반해 학생과의 관계에서는 여성상위로 매우 능동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연출 역시 호정이 전과는 다른 능동적인 여성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불감증에 시달렸던 남편의 잠자리에서 와는 다르게 호정은 격렬한 오르가즘을 느낀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가는 부분은 호정이 관계 도중 슬픔의 눈물인지 기쁨의 눈물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석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기존의 ‘억압’ 적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 ‘한 여성’으로써 다시 태어났음을 알리는 신호탄, 지금까지의 시간에 대한 회한과, 동시에 그것을 벗어난 데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장면에서 호정을 비춰주는 배경의 조명은 그런 부분을 나타내기 위한 감독의 장치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호정은 이제 남성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다. 마지막 장면에서 호정은 그 연습실을 혼자 차지하고 신나게 청소를 한다. 마치 과거의 흔적을 지워내는 것처럼. 그런 호정에게 영작은 “잘 할게” 라며 뒤늦은 손을 내밀지만 호정은 단호히 말한다. “당신. 아웃이야.” 그리고 나가는 영작의 뒤를 호정은 다시 한 번 신나게 밀대로 밀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지금까지 내 나름의 방식대로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을 분석해 보았다. 「하녀」와 다시 한 번 비교해 보면 「하녀」는 우리 사회에 나타난 계급의 폐쇄성, ‘한계지움’을 중심적으로 재현했다고 한다면, 「바람난 가족」은 남성 중심적 가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압력’을 중심적으로 재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앞에서 서술 했듯이 문화는 구조에 영향을 받는 우리 삶의 전반적 방식, 그리고 정서의 구조를 통한 의미화의 실천 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모두 정치와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삶은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구조를 만드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정치’ 이다. 정치는 나름의 옳은 것을 판단하는 기준인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그것을 현실 속에 나타나게 한다. 엄밀히 말하면「바람난 가족」에 나타난 가부장적, 남성 우월 주의적 가족 구조 역시 한국 문화의 맥락 속에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사실 정치를 통해서 우리의 삶에 구조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문화의 두 번째 의미인 정서의 구조를 통한 의미화의 실천 역시 그렇다. 우리가 ‘어머니’ 라는 것에서 어떤 정서의 구조를 통해 ‘헌신해야 하는 존재’ 라는 의미를 끌어내느냐, 혹은 한 여자로서의 ‘인간’ 이라는 의미를 끌어내느냐 하는 사고의 방향은, 어떠한 것이 더 지당한가? 하는 가치 판단을 내포하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결국 문화는 정치적이며, 정치는 또한 문화의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바람난 가족」에서 살펴봤듯이 영화, 다시 말하면 영화뿐만 아닌 모든 문화적 텍스트는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을 재현하고 그것을 통해서 어떤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그리고 그 재현은 역시 어떤 정서의 구조, 이데올로기를 거쳐서 이루어진다. 영화 속의 사건들은 없었던 일이라는 점에서는 픽션이지만 사회 구조 속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사건을 그린다는 측면에서는 논픽션이다. 문화 텍스트의 현실 재현은「바람난 가족」에서처럼 현재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심을 갖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바람난 가족」에서 나타나는 현실 속의 지배적인 구조는 ‘가부장적 가족 구조’, 그리고 ‘남성 우월 주의적 사고’ 이다. 그 Articulation 에 영화는 ‘개인의 행복’, 그리고 ‘남녀 평등’ 과 같은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통해 Dis-Articulation 하며, 가족이라는 것을 새로운 의미로 Re-Articulation 해볼 수 있을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렇게 문화적 텍스트는 현실을 재현하면서 또한 그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혹자들은「바람난 가족」이 단순히 외도를 부추기는 영화라며 혹평을 하고는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람’ 그 자체도 아니다. ‘바람’ 은 단지 그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그것을 표현 하기 위해 사용된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된 ‘여성의 진정한 행복’, 그리고 ‘권리’ 가 아니었을까 싶다.
극중 봉태규가 연기한 학생이 호정에게 해준 재미있는 이야기로 글을 맺으려고 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책이 전부 태워 없어진 세상. 주인공은 책을 찾아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그 마을에도 역시 책은 없다. 대신에 사람들이 바로 책이 되어 있다. 주인공도 역시 어떤 책이 되어있다. 노인이 죽어갈 때에는 옆에 꼬마가 앉아있다. 노인이 책의 한 구절을 읽으면 꼬마가 그것을 따라한다. 그렇게 다음 구절 다음 구절... 노인은 꼬마에게 자기 책을 물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은 죽고, 꼬마는 노인의 책을 다시 읊는다. 감독은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또한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인간을 구성한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나는 또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는가. 한 번 더 깊이 고민해 보고 한 번 더 반성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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