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철학] 의미 있는 삶

SGZ 2011. 5. 20. 04:50

레포트 - 의미 있는 삶

  첫 번째 사실. '왜?' 라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인간의 모든 학문과 문명은 이 질문을 통해서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상이 왜 이러한가?' 하는 질문을 통해 철학이 시작되었다. '물질들은 왜 그러한가?' 하는 질문을 통해 물리학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왜 저러한가?' 하는 질문을 통해 사회학이 시작되었을 것이고, '살아있는 것들은 왜 이러저러한가?' 라는 질문을 통해 생물학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왜?', '어째서?' 라고 묻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두 번째 사실. 나는 살고 있다.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사실만큼 중요한 사실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우리는 다른 것들에는 '왜?' 라는 질문을 많이 던지지만 우리가 살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에 대한 질문을 간과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현대 사회에 있을 것이다. 앞의 레포트에서 썼듯, 현대 사회는 이러한 사변적인 질문들을 던져보기에는 너무 바쁜 세상이다. 판치는 물질적인 가치들에 대한 고찰을 하기에도 에너지와 시간이 너무 부족한 세상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질문은 물질적인 것을 앞서 인간의 존재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우리 삶의 가장 큰 단위의 청사진은 이러한 질문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은 간과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알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두루뭉술하게 그러한가보다 하는 결론을 내리기에 우리들은 너무 똑똑해졌다. 예를 들어, 옛날 사람들이 '신의 뜻에 따르기 위해 산다' 라고 답을 내릴 수 있었다면 현대인들은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다. 이는 인간의 사고 능력이 발달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본질적인 질문들이 요구하는 사고가 복잡해지면서, 사람들은 그냥 이러한 문제들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본질적인' 질문들이 필수적이다.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아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 를 생각 하기 에 앞서 '돈을 왜 벌어야 하는 것인가?' '돈이라는 것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더욱 더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 중요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말했다. '여러분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자기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12절, 내 인생을 결정한 순간들, 383p) 여기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산다는 것을 이러한 본질적인 질문 없이 살아간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내가 잘못 해석한 것일까?

  자, 그렇다면 물어보자. '나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삶의 의미와 직결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어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에는 두 가지 큰 난점이 있다. 첫째 난점은, 우리는 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옛날 사람들은 그 의미를 '신의 존재'에서 쉽게 찾았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신의 존재를 상정해야 할 이유를 잃게 되었다. 스티븐 핑커에 의하면, 사랑, 의지, 양심과 같은 기능들도 생물학적이라면 유령은 할 일이 더욱 없어진다고 한다.(3절, 진화론의 관점에서 본 인간, 315p) 이러한 논리는 신의 존재에도 적용이 된다. 우리의 발달한 과학은 신의 존재를 도입하지 않고도 세상의 현상들을 거의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니체의 말대로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난점은 회의주의이다. 이 역시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발생하는 난점으로, 인간의 인지가 닿는 범위가 우주적으로 넓어지면서 발생한다. 과거에는 우주의 중심이었던 지구가 태양에게 그 위치를 빼앗겼으며, 그 태양 뿐 아니라 태양계 전체마저도 거대한 은하의 극히 작은 일부분이라는 것은 밝혀진 사실이다. 심지어 그 거대한 은하마저도 우주에는 셀 수 없이 많다. 우리 세계의 보잘 것 없는 모습(2절, 작고 푸른 점: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 303p) 과 같은 표현, 그리고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무대 속에서 하나의 극히 작은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2절, 작고 푸른 점: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 305p) 는 사실은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방해한다. 무슨 얘기를 해도, '그래봤자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티끌에 불과하다' 라고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앞의 두 난점들로 인해 개인의 삶에서든 세계의 역사에서든, 삶의 의미 관계는 사라졌다.(1절, 신, 인간, 그리고 삶의 의미, 295p) 그렇다면 우리는 의미 없는 삶을 단순히 죽음을 향해 살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4절, 인간의 선택과 책임, 317p). 나는 이러한 사르트르의 성찰에 깊이 동의한다. 또한 그는 말한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4절, 인간의 선택과 책임, 317p) 그의 생각은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다.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절대자, 곧 신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다른 절대자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절대자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절대자를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절대자가 없어졌다면, 우리 스스로가 그 절대자로 군림하면 된다. 의미를 부여해주는 존재가 없어졌다면, 우리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 이 얼마나 창의적인 생각인가! 스스로 절대자로 군림한 자가 보기에, 절대자의 뜻에 따르는 자들은 타성적인 삶을 사는 사람일 뿐이다.

  다음으로, 우주적 관점에서 본 회의주의는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우주가 아니라 인간이다. 굳이 우주적 관점을 끌어들여서 우리의 존재를 작게 만들 필요는 없다. 우리가 '우주적 관점' 하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치 판단을 함에 있어서, '우주적 관점' 보다는 '나의 관점' 혹은 '인간의 관점' 하에서 생각하는 것이 더욱 옳은 것이라고 판단된다. '나의 관점' 하에서는 우주적으로 보았을 때 어떻든 간에 나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둘째로, 모든 전체는 부분의 합이다. 우주는 무한히 팽창하고 있다. 전체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한다면, 인간뿐 아니라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다. 지구도, 태양계도, 우리 은하 전체도, 어딘가에 존재할 지 모르는 외계생명체도 무의미한 것이 된다. 작은 부분들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전체 또한 부정될 수 밖에 없다. 실상은 전체의 '작은 부분' 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전체의 작은 '부분' 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신 혹은 사후세계 같은 것들에 대한 불가지론자이다. 인간으로써는 그것에 대해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진리는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답이 없는 질문이라고 해서 무의미한 질문은 아니다. 만인이 공감할 필요는 없다. 충분한 고찰을 통해 내려진 나름의 답은 그것 자체로 삶의 대들보 역할을 한다. 김펠의 말처럼 이 세상이 전적으로 상상으로 만들어진 곳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13절, 바보 김펠, 303p)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왕 꾸어야 하는 꿈이라면, 나는 의미없다고 생각되는 꿈보다는 의미 있는 꿈을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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