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윤리학] 리쾨르의 윤리관, 아리스토텔레스의 친애 확장 가능성

SGZ 2013. 3. 8. 23:47



Question 1. Why it is not adequate to account for our responsibilities towards others by extending Aristotle’s conception of friendship to all others, or by expanding the circle of those we care about?

‘필요 없이 많은 전제는 설정하지 말아야 한다’ 는 Occam의 면도날이 말하는 바와 같이, 무엇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은 쓸모 없는 존재자를 상정하면 좋지 않다. 존재자, 혹은 전제의 상정은 그것이 필요한 것일 경우에만 정당화 된다. 다시 말하면, 더욱 적은 것으로 더욱 많은 것을 설명하는 이론이 더 훌륭한 이론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친애) 의 개념을 확장시켜서 타인에 대한 의무적인 부분까지 설명하려는 노력은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미 필자가 교재에서 입장을 밝혔듯이, 내 생각에도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유익함에서 오는 우정, 즐거움을 이유로 한 우정, 그리고 덕으로 이어진 우정의 세 가지로 구분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진정된 우정은 덕으로 이어진 우정이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삼등분 해서 유형을 나누는 이러한 구분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말하는 우정도 우리가 현 시대에 말하는 우정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우정,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우정과 같은 것을 확장시켜 타인에 대한 의무감으로 가져가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생각해 보자. 나는 내 친구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내가 용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나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얼마든지 그를 위해 도움을 줄 의향이 있다. 이는 친구를 가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원을 조금 더 확대해 보자. 나는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딱한 처지의 외국인 노동자를 보고 동정심을 느껴서 돈을 준 적이 있다. 또, TV 에서 나오는 아프리카의 불쌍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동정심을 느껴 전화로 모금을 한 적도 있다. 그러한 때의 감정을 생각해보면 그냥 그들이 잘 되었으면, 밥이나 한끼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 그로 인해 내가 어떤 이익을 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사실 그들이 나에게 어떤 이익도 줄 수도 없는 사람들인 것을 잘 안다. 그러한 것을 보면, 그러한 돌봄의 범위를 인류 전체로 확장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사실 주기적으로 해외 후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면, 그러한 감정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말이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것은 타인에 대한 ‘의무감’ 과는 질적으로 분명히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우정이 확대되어 발현된 이타심과, 타인에 대한 의무감의 가장 큰 차이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다. 앞의 문단에서 들은 이타심의 예들을 보면 모두 ‘주는 사람’ 과 ‘받는 사람’ 을 나눌 수 있다. 주는 사람은 나였고, 받는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친구,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밥을 굶는 어린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이타심에서 비롯한 선행과는 달리, 타인에 대한 의무감에는 그러한 ‘주는 것과 받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A 와 B 라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A 가 B 에게 의무감을 느껴 어떤 행위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A 가 그 행위를 ‘해 주는’ 사람으로써 B 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B 가 그러한 것을 받을 일종의 권리가 있기 때문에 A 가 B 에게 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하면 A 가 주는 것이 아니라, A 가 당연히 해주어야 하는 것을 한 것뿐이다. 의무, 혹은 책임이라는 단어의 뜻만 살펴봐도 차이는 알 수 있다. 의무나 책임은 타인에게 ‘해야 하는’ 것이고, 이타심은 타인을 위해 안해도 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의무감은 가지지 않으면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지만, 이타심은 가지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Question 2. What is Ricoeur’s concept of an “ethical aim” and what is its significance in his theory?

나는 이렇게 이타심과 의무감의 차이는 분명히 있고 그것을 하나로 완벽하게 환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수업시간에 Ricoeur 의 설명이 지금까지의 모든 윤리학을 그냥 나열해놓은 것 같다고 비판한 학우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이타심과 의무감 같은 것의 질적인 차이가 있어 보이는 한, Ricoeur 의 종합이 다른 학우가 말한 것처럼 열거일 뿐일지라도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읽었다.

Ethical aim 은 Ricoeur 가 제시하는 인간 존재의 내적 추구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것처럼 인간 역시 목적론적으로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추구하는 바는 세 단계로 나뉘는데, 첫째로 개인적 단계에서의 에우다이모니아, 사회적 단계에서의 필리아 추구, 그리고 사회정치적 정의의 추구이다. 이러한 세 단계가 모두 있어야만 인간의 행위들이 잘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목적에 목적론적 담론, 의무론적 담론, 그리고 정치적 담론의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고, 각 담론들에서 위에서 말한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한다. 

Question 3. What virtues are suggested by this ethical aim as it is expressed in the discourse of politics?

목적론이나 의무론적 담론은 앞에서 비교적 많은 논의가 된 것 같아서, 이번 에세이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정치적 담론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려고 한다. Ricoeur의 정치적 담론은 비교적 현대에 와서 필요하게 된 개념으로 보인다. 옛날처럼 비교적 공동체가 작은 사회에서는 이러한 이른바 ‘성문법’ 적 장치는 필요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충분히 커졌고 소위 ‘정의’ 에 대한 요구가 생기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볼 수 없을 정도로 개인화되고 거대화된 사회에서 이제는 제도가 최소한의 것들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쉽지 않다. 그러한 장치가 생겨야 한다면, 어떤 장치가 생겨야 하는가? 보통 그러한 장치가 발효되는 범위는 여러 공동체를 포괄하는 큰 범위가 많으므로 여러 갈등과 잡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Ricoeur 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인정한다. 그는 개인이나 공동체를 포기하는 것은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이 불가능할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다만 그가 요구하는 것은 자신, 그리고 자신의 공동체의 신념을 인정하는 만큼 타인의 그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건전한 토론을 통해 모두가 받아들여 생긴 정책이라야 진정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옳은 토론’ 이라는 것이 조금 붕 뜬 개념 같긴 하지만 일리는 있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정치적 단계에서의 덕은 이러한 건강한 토론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영역에서 타인과 관련하여 중요한 덕은 비판적 배려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비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중의 하나인 개별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의 신념을 가지는 만큼 타인의 신념을 인정하되,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 맥락에서 덕은 타인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덕, 그리고 모든 의견들을 비판적, 이성적으로 검토해보려는 의지와 같은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앞에서와 같이 타인의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우리의 것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사회적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 이런 태도 또한 건강한 토론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개인으로써 덕스러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신념도 완벽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완벽한 신념이 없기 때문에 확실함은 없지만 최선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한다. 그러한 덕스러운 방향은 겸손과 인내와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충족하는 사람을 우리는 ‘시민’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시민으로서의 덕은 정의 추구, 타인에 대한 믿음, 그리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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