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윤리학] 흄의 윤리학적 관점

SGZ 2013. 3. 8. 23:33





Question 1. Why does Hume think it is not possible to derive moral principles from reason alone? From what does Hume derive moral principles?

나는 첫 번째 에세이의 마지막 문단에서 이성만을 강조하는 의무 윤리적 관점에 반대하며 글을 맺었다. 그 부분은 아래와 같다:

“감정적 요소들이 모두 제거된 도덕은 기계 혹은 컴퓨터의 도덕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모든 인류가 사라진 곳에 무슨 도덕이 남아있을 것인가. 인간의 도덕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인간과 기계의 가장 명확한 구별인 ‘감성’ 을 배제하려 한다는 것은 인간을 기계로 보는 것과 다름 아니다. (중략) 경험적으로 도덕적인 행위를 할 때에는 항상 감성적인 작용이 있었다. (중략) 나는 도덕을 생각함에 있어서 ‘감성’ 을 오히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중략)”

흄의 윤리학적 관점을 읽어나가면서 한 가지 놀란 점은 내가 첫 번째 에세이에서 제기한 의문과 모종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흄은 유명한 경험주의자답게 모든 형이상학적 존재자들에 의지한 철학들을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진실된 앎은 모두 직접적인 인간의 ‘경험’ 을 토대로 해야 한다. 직접적으로 감각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존재자에 의지한 앎은 기반이 의심스러운 앎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성을 신적인 능력, 또는 육체적인 것을 뛰어넘는 영혼의 능력으로 상정하고 찬양했던 과거의 대부분의 윤리학들은 부정된다.

그렇다면 이성에서 신적인 능력, 육체적인 것 이상의 신비한 능력이라는 속성을 축출해낸 이성은 어떤 모습일까? 그에게 이성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은 수학적 계산을 하는, 그리고 가정으로부터 결론을 연역해내는 것과 같은 능력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은 입력된 데이터로부터 논리에 따라 옳은 결론(출력)을 끌어내는 것이다. (물론 그가 직접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흄에게 감정을 모두 배제하고 이성만 남은 인간은 컴퓨터와 다름없다. 나의 이해 대로 나의 언어로 풀어 말하자면, 이성은 연역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연역법의 특징은 결론이 전제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연역 추론이 아니고서는 전제 속에 없던 것을 결론으로 연역해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애시당초 입력된 데이터 자체에 ‘당위’적 요소가 없다면 연역의 결과에서 당위적 사실을 끌어내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그러나 처음 입력된 데이터는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성은 그 데이터를 연역하는 것이지 입력된 데이터를 설명해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성’ 이라는 기반에서 도덕 이론의 기반을 쌓으려는 시도는 불가능한 것이다.

흄의 이러한 이성관은 ‘도구적 이성관’ 이라고 볼 수 있다. 도구라면 어떤 도구를 말하는 것인가? 바로 우리의 욕망이 사용하는 도구이다.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한 도구이다. 이렇듯 흄은 이성의 중요성을 많은 부분 감정에게 돌려주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가장 근본적 동인은 이성이 아니라 욕망과 감정이며, 이성은 그 욕망과 감정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최선을 계산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원하지 않으면, 이성은 멈춰버린다. 그래서 흄이 생각하는 도덕 규범의 기초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고, 걱정에 있다. 그는 이를 “동정”, “애착”, “인류애의 감정” 등의 여러가지로 불렀다. 

나는 이러한 그의 ‘도구적 이성관’ 과 같은 관점에 당장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감성과 이성의 관계’ 는 ‘어떤 것을 욕망하게 하는 동인-그 욕망을 이루게 하는 도구’ 처럼 간단하게 도식화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 둘은 사실 대단히 복잡하게 엮여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학자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흄의 철학은 철학의 역사 위에서 뚜렷한 업적이 있다. 그것은 윤리와 도덕을 이성 중심적으로만 생각한 고대와 중세의 긴 시간을 넘어 윤리와 도덕의 논의에 감성을 끌어왔다는 점이다. 첫 번째 에세이에서 쓴 것처럼, 나는 많은 윤리학들에서 도덕을 생각하면서 감정을 배제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흄도 그러한 부분을 비슷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이성을 실제 이성 이상으로 평가절하 한 느낌도 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철학의 역사 상에서 중요한 변화의 시발점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Question 2. For Hume, what is the most important virtue to have in order to live morally?

위 문단에 이어, 흄이 도덕적 기초를 타인에 대한 동정, 애착, 그리고 인류애의 감정에서 찾은 것에서 그가 생각하는 덕도 자연스럽게 추론해볼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덕스러운 사람은 타인에 대한 동정을 잘 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흄이 말하는 덕은 타인에 대해 동정할 수 있는 일종의 ‘감정’ 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전체라고는 교재에 나와있지 않다) 다른 사람에 대해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도덕은 그러한 감정의 체계적인 표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부분은 측은지심을 인간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하여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의 인간관과도 유사성이 보이는 지점이다. 

그러나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대한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라는 명제와, 모든 인간은 경험 이전, 곧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인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는 경험론의 기본적인 기조와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는 명제는 마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고, 그것은 가능적인 능력으로써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그 시절이 아니라 과학기술이 지극히 발달한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백지론을 통해 로크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이 전적으로 경험에 의해 형성되느냐, 혹은 어떤 배경을 지니고 태어나는가에 대한 답은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많은 부분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특히 성격이나 감정과 같은 부분은 더욱 그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소심한 성격, 다혈질 성격, 등 성격의 많은 부분이 유전자에 의해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현대에 있어서는 상식적인 지식이다.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서, 성격이 감정을 표출하는 것의 큰 방향성이라고 본다면 ‘감정’ 으로 생각된 흄의 덕은 역시 상당부분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덕은 노력으로 쌓아가기 힘들어 지는, 곧 태어날때부터 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 측면에서 교재를 읽어 나가면서 흄에게 덕은 다름아닌 호의적인 ‘감정’ 이라는 부분에서는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아마도 흄은 성격과 감정 역시 후천적인 경험을 통해서 발달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 현대의 관점에서는 그의 덕 관점에 이러한 문제점이 있음을 찾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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