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윤리학] “기초주의”, “해석학” 덕윤리와의 관계? 도덕 규범의 토대. 상대주의와 덕윤리

SGZ 2013. 3. 8. 22:40





Question 8. “foundationalism” 과 “hermeneutics” 를 설명하라. 덕윤리와 이들 개념의 관계는? 도덕 규범의 토대를 찾는 것은 중요한 것일까? 또한 그것이 가능할까?

의무 윤리학과 덕 윤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절대적인 ‘도덕률’ 의 존재 여부를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의무 윤리학자들은 절대적인 도덕률의 존재를 인정한다. 여기서 ‘절대적’ 이라는 말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하기에 개개인의 주관, 혹은 여러 사회에 따른 차이가 없다. 사회나 개인에 따른 차이가 없기에, 의무 윤리학자들의 도덕률은 보편적이다. 반면 덕 윤리에서는 절대적 도덕률을 인정하지 않는다. 덕 윤리학자들에게 도덕, 윤리는 ‘우리 안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개인들의 모임인 사회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조금 더 세련되게 표현하면, 질문 8번에서 제기하는 의무 윤리의 “foundationalism” 과 덕 윤리의 “hermeneutics” 의 차이이다. 의무 윤리는 절대적인 도덕률을 존재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도덕을 논리적, 선험적, 보편적인 기초 위에서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기에 그들을 “기초주의적” 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덕 윤리는 도덕을 개인과 사회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속해있는 사회와 개인의 상황과 역시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다. 때문에 상황과 사회적 맥락의 해석이 중요한 덕 윤리는 “해석학적” 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의무 윤리학자들이 말하는 감정이 모두 배제된 “절대적 도덕 규범” 의 가능성에 대해서 나는 일단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규범이 될 수 있을 만한 유력한 규범들이 몇 가지 언급된 기억이 있다. 일단 “거짓말 하지 말라” 와 같은 규범은 상식적 데이터에 부합하지 않는다. 병문안을 가서 고마워하는 친구에게 굳이 “난 의무적으로 온 거야” 라고 말하고, 안 어울리는 머리를 하고 와서 예쁘냐고 물어보는 여자친구한테 “정말 안 어울려” 라고 말해야 하는 세상이 더욱 도덕적인 세상 같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검색을 해본 결과 “살인하지 말라” 그리고 “도둑질하지 말라” 와 같이 전 지구 보편적일 것 같은 규범 역시 예외를 찾을 수 있었다. 에스키모인 들은 갓난 여자아이를 죽이는 경우가 흔했고, 노인이 많이 늙으면 빙산에 얼어 죽도록, 혹은 곰이 잡아 먹도록 방치했다고 한다. 또한 고대 스파르타에서는 어린 아이들에게 도둑질을 장려했고, 들킬 시에는 도둑질을 해서가 아니라 들킨 것에 대한 벌만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도덕 규범들을 어긴 에스키모인 들과 고대 스파르타인 들은 모두 비도덕적인 인간들로 간주할 수 있는가? 그 점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항상 이동해야 했던 에스키모인 들은 인구를 적게 유지해야 했고, 강한 전사가 필요했던 스파르타인 들은 아이들을 강하게 키울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배경에는 그러할 만한 상황들과 삶의 방식들이 있었던 것이다. 


Question 9. 상대주의의 문제는 무엇이고, 그것은 왜 덕 윤리학의 심각한 문제로 간주되는가? 이 지적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러한 배경 상황들과 다양한 삶의 방식들을 모두 인정한다면 ‘상대주의’ 라는 커다란 문제점이 생긴다. ‘상대주의’ 는 위에서 언급되었던 의무 윤리의 ‘기초주의’ 와 대비되는 또 다른 용어로, 다양한 사회에서 다양한 윤리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다양한 윤리들은 모두 어떤 사회의 맥락 속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들 간의 절대적 우위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절대적인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도덕 이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규범의 지시’ 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교재의 초반부에서 우리는 도덕 이론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네 가지 임무들을 배웠다. 그 네 가지 임무들은 아래와 같다:

1. 도덕의 이해
2. 규범의 지시
3. 규범들의 정당화
4. 그러한 규범들이 우리의 삶에 알맞은 지를 설명

이 네 가지 임무들을 기능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해보면 크게 ‘당위’, 그리고 ‘설명’ 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당위는 ‘어떠해야 한다’ 를 말하는 일종의 주장이며, 설명은 ‘어떠한지’ 를 기술하는 일종의 현상 묘사이다. 이 임무들 중 2번 임무, 규범의 지시는 지극히 당위적인 목적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도덕 이론은 “어떠한 규범을 따라야 하는지” 에 대해 사람들에게 준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윤리에 있어서 사회와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모든 윤리적 기준은 개인과 사회의 맥락 속에서 그럴 만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규범을 따르라’ 가 아니라, ‘모든 규범은 나름대로 옳다’ 는 것만이 도출된다. 이러한 상대주의의 문제점은 덕 윤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덕 윤리학적 관점에서 도덕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개인의 상황과 사회적 맥락 역시 중요한 고려 대상이기 때문이다. 윤리의 보편성을 포기하면 규범의 처방은 난점을 갖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지적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인간과 사회의 존재와 독립적인 도덕률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너도 옳고 나도 옳고 모두 옳다’ 는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의 단초로 맹자가 제시한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예시가 있다. 맹자는 그 예를 통해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본성을 제시했다. 그 예는 이렇다. 어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갑작스레 보게 되면, 어떤 사람이던지 그 아이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측은지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맹자는 그러한 공통적인 사람들의 반응을 기반으로 ‘仁’ 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주장했다. 에스키모인 들이 생존을 위해 갓난 아이들을 죽이고는 했지만,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서 갑작스럽게 어떤 아이가 위험한 상황에 처한 상황을 목격한다면 그들 역시 측은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는 말이다. 맹자의 이러한 예시에는 공감이 된다. 아무리 냉혈한이라도 순간적으로 생명의 위협에 처한 아이를 봤을 때 ‘아차’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나는 그러한 인류 공통적인 ‘감성’ 을 고려한 기반 위에서라면 개인, 사회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도덕을 가정하지 않고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보편성은 의무 윤리에서 가정하는 절대적, 독립적 보편성과는 다르다. 의무 윤리학자들이 말하는 인간 존재와 독립적이고, 모든 감정적 요소들을 제거한 도덕률은 직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적 요소들이 모두 제거된 도덕은 기계 혹은 컴퓨터의 도덕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모든 인류가 사라진 곳에 무슨 도덕이 남아있을 것인가. 인간의 도덕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인간과 기계의 가장 명확한 구별인 ‘감성’ 을 배제하려 한다는 것은 인간을 기계로 보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의무 윤리학은 손쉽게 얻은 보편성을 통해 당위는 제공하기 용이하지만 설명적인 측면에서는 덕 윤리학에 비해 많은 부분 부족해 보인다. 경험적으로 도덕적인 행위를 할 때에는 항상 감성적인 작용이 있었다. 지하철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를 봤을 때 ‘얼마나 힘드실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도와드리게 되었고,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를 몇 십분 동안 들고 다녔던 것은 ‘내가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어서’ 라는 감정이 그 행동의 배경에 있었다. 이렇게 인간은 이성 못지 않게 감성에 지배 받는 동물이며, 감성 그 자체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부정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때문에 나는 도덕을 생각함에 있어서 ‘감성’ 을 오히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맹자의 측은지심 같은 ‘인간’ 이라는 존재라면 공통적으로 갖는 본성에서 도덕적 기반을 찾는다면, 의무 윤리학에서처럼 굳이 도덕을 인간 외부적 존재자로 가정하지 않아도 보편성의 확보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지극히 인간적인 기반 위에서 “진짜 인간됨” 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일. 그 일이 윤리학을 통해서 진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