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ion 1. What does Aristotle understand by ethics?
아리스토텔레스가 ‘Ethics’ 라는 말을 통해 표현하는 바는 현대 윤리학, 특히 의무 윤리학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Ethics 는 그리스어 어원을 찾아감으로써 추론해볼 수 있다. ‘Ethics’ 의 그리스어 어원은 ‘ethos’ 로, 이는 사회의 관습, 삶에 대한 관점을 포함하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Ethics 는 “어떤 사람이 사회 속에서 존경 받는가?” 그리고 “어떤 행동들이 존경 받거나 또는 경멸 받는가? 와 같은 질문들을 포함한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존재, 그리고 인간으로써 번창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까지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인가?” 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였다. 이러한 관점은 이전 Chapter 에서 배운 덕 윤리의 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나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Ethics’ 에 더욱 동의한다. 의무 윤리를 통해 말해지는 윤리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윤리적인 사람’ 혹은 ‘도덕적인 사람’ 이라고 말할 때, 그러한 사람은 단순히 어떤 규범을 잘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윤리적, 도덕적인 사람은 오히려 스스로 그 이상의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무 윤리학에서는 이러한 “의무 이상의” 부분을 배제한다. 나는 이 점에서 의무 윤리학의 범위는 ‘윤리학’ 이라는 이름을 갖기엔 너무 협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윤리’학 이라면 응당 윤리 그 자체를 전체로써 다뤄야 할 것이다. ‘윤리’ 라는 것이 나타내는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을 설명하는 것은 윤리학의 부분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언론학, 정치학 등이 다루는 범위에 따라 모두 사회과학의 일부이듯이 말이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으로 돌아가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을 참 중요시 했던 사람인 것 같다. 그는 모든 목적중의 궁극적인 목적을 찾는다. 그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앞에서 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도 한번 해보자. 나는 왜 지금 공부하는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한다. 그렇다면 왜 더 나은 사람이 되려 하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냥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결론은 교재에서 말한 “행복해지고 싶어서” 와는 다르지만, 다행히 이 또한 더 나은 인간 존재를 역설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맥락과 일치한다. 이렇게 그 이상의 목적을 물을 수 없는 것. 그것 자체로 이유나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은 것.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선the good” 이라고 했다.
Question 2. What is a “teleological explanation” and how does it apply to human beings?
앞의 질문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그리고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인간 존재로써의 선은 ‘행복eudaimonia’ 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일반적인 행복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는 ‘eudaimonia’ 의 어원을 쫓아가 봄으로써 알 수 있다. 희랍어인 ‘eudaimonia’ 는 ‘good’ 을 뜻하는 ‘eu’, 그리고 ‘정신’ 또는 ‘행복’을 의미하는 ‘daimon’으로 구성된 단어이다. 이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행복보다는 더욱 정신적인 측면에 집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궁극적 선인 행복에 대해 이해했다면, 또 이제 그러한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대한 대답 역시 ‘목적’을 따져봄으로써 얻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루트 연주자’ 예시를 인용해보자. 플루트 연주자로써의 고유한 기능은 플루트를 잘 부는 것이며, 그 기능은 동시에 목적이다. 같은 방식으로 그는 인간의 목적 역시 추론한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목적론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목적은 무엇인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 영혼을 어떻게 구분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영혼을 식물적 측면, 동물적 측면, 숙고적 측면, 그리고 관조적 측면의 네 가지로 구분했다. 식물적 측면은 신체의 생물학적 측면으로, 생장, 혈액순환 같은 몸의 기계적인 측면이다. 동물적 측면은 욕망과 연결되는 측면으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욕망하게 한다. 앞의 두 측면은 인간이 아닌 생물 역시 공유하는 것으로, 인간 고유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반면 숙고적 측면과 관조적 측면은 인간만이 갖는 것이다. 먼저 숙고적 측면은 행동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를 목적으로 이끄는 일종의 방법 혹은 전략과 같은 것이다. 관조적 측면은 불변하는 것에 대해 사유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진정한 앎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이야말로 인간 고유의 것이며, 또한 이성과 관련된 것이다. 이렇게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기능은 이성적 기능이며, 그러므로 인간의 목적은 이러한 이성적인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인간은 인간 존재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변에서 나는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과연 어떤 것의 고유의 기능을 그것의 목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을까? 사실 인간이 만들어 낸 창조물은 인간이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명확한 목적을 제시할 수 있다. 플루트 연주자는 플루트를 부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써 만들어낸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의 목적은 플루트를 훌륭하게 부는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수업시간에 언급되었던 ‘칼’ 의 예시 역시 그렇다. ‘칼’ 은 ‘자른다’ 이라는 목적을 바탕으로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칼의 목적은 분명히 잘 자르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창조물은 선행하는 목적에 따라 생산된 개념이나 물건이기 때문에 목적에 부합하는 기능을 갖게 된다. 그로 인해 기능에서 목적을 도출해 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이 아닌 경우에는 조금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유칼립투스 나무는 태우면 모기향과 같은 효과가 있어서, 정글에 사는 사람들은 이를 이용하여 모기를 쫓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칼립투스 나무는 모기를 쫓는 특유의 기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유칼립투스 나무는 모기를 쫓는 것이 목적이다’ 라는 명제를 도출해 내는 것은 합당한가? 또 다른 예로 납작한 돌과 물수제비를 생각해보자. 납작한 돌은 물수제비가 잘 떠진다. 그러므로 ‘물수제비가 잘 떠짐’ 은 납작한 돌 특유의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기능을 통해 납작한 돌은 물수제비가 잘 떠지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는가? 인간의 창조물들과는 달리 자연물들에 대해서는 쉽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인간 존재 역시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다. 때문에 그러한 고유의 기능을 통한 목적 추론이 쉬 납득되지 않는 지점에 다다른다.
그것이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해 봤다. 첫째로, ‘기능’ 이라는 개념 자체의 특성이다. 생각해보면 기능은 그 자체로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인간의 입장에서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특성에 기능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유용하지 않은 특성에는 기능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불의 ‘열을 낸다’는 특성에 ‘기능’ 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색하지 않지만 불은 ‘위로 향한다’ 는 특성은 기능이라기 보다는 그냥 특성에 가깝다. 또 개의 예를 생각해 보자. 인간에게 유용한 ‘집을 잘 지킨다’ 또는 ‘인간에게 충성한다’ 는 특성은 개의 기능으로 생각된다. 반면 ‘여기저기에 소변으로 영역표시를 한다’ 는 인간에게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 특성은 기능 이라기 보다는 그냥 특성으로 본다. 이렇게 기능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관점이 지극히 관여된 것으로 보인다. 헌데 이러한 기능을 바탕으로 모든 사물의 존재 목적을 추론해 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너무 인간의 관점에서만 생각한 것이 아닌가. 인간이 아니라 개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집을 지키고, 충성하는 것 못지 않게 영역표시를 하는 것도 중요할 텐데 말이다.
기능을 통한 목적의 추론이 나에게 명료하지 않았던 두 번째 이유는, 수업시간에 언급되었던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상태’ 에서, 그러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라는 ‘당위’로 진행되는 부분에서 명료하게 납득될 수 없었다. 어떤 기능이 당위로 이어져야 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고, 만일 모든 그러한 것이 그러해야 하는 것이라면, 자칫 극단적 보수주의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그것이 ‘틀리다’ 고 주장할 수도 없지만, 분명한 것은 명확한 논변의 근거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두 번째 Chapter의 질문들에 대해 답하면서 나의 이해와 그 과정에서 가지게 되었던 의문점들을 정리해 봤다. 앎의 부족에서 오는 의문들일 수 있음을 알기에 한편 걱정도 되긴 하지만, 아직 공부할 것들이 많다는 점에서 기대도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최고의 선으로 제시한 ‘행복’은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있던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와도 일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 를 배움을 통해 나의 ‘행복’도 어떻게 구체화 해 나가야 할 지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되었다. 비록 그것을 가질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그것 만으로도 사실 진정한 행복에 더욱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교재에서, 영혼의 관조적 측면의 성취는 꼭 진정한 앎을 획득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잘 contemplate 하는 그 자체에 있다고 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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