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ion 1. Study the lists of virtues given at the beginning of Chapter 5 and identify which one you think is the most important. Give reasons why you think it important and explain what the virtue consists in.
이번 챕터에서 우리는 상식적인 덕의 개념과 일치하는 여러 가지 덕의 목록들을 확인했다. 덕의 목록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던 필자가, 책에 덕의 목록을 제시하다니 무언가 아이러니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앞에서 조금은 뜬 구름 잡는 개념 같았던 덕이 현대사회에 상식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상식적이었던 만큼, 무엇이 더 중요하다거나 더 근본적이라는 이야기는 쉽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질문이 요구하는 바가 그 ‘상식적인’ 덕의 목록에서 무언가를 고르라는 것이라면, 유감이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중용’ 이라는 말은 내가 원래 좋아하던 말이다. 그래서인지 역시 ‘중용’ 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많은 공감이 간다. 대등한 상식적인 덕을 열거해놓은 리스트에서 하나를 억지로 끄집어 내는 것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덕이 있다. 일상적인 덕들보다 더욱 기초적인 덕, 혹은 상위의 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슬기로움(practical wisdom/phronesis)이다. 논의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슬기로움이 무엇이었는지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나의 이해에 따르면 슬기로움은 일단 아는 것을 포함한다. 아는 것은 곧 상황파악을 뜻한다. 그리고 그 상황파악에 따른 올바른 행동의 동인까지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 슬기로운 사람은 상황파악을 분명히 하고, 올바른 성격의 덕을 가지고 있기에 그에 따라서 옳은 행동의 동인까지를 가지는 사람이다.
더욱 상위의 것, 그리고 기초적인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상위의 기초적인 것은 그것에 속한 하위의 것들의 핵심적인 공통점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 없이는 하위의 것도 성립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그러한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슬기로움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재에서 나온 6가지 덕의 분류를 살펴보자. 그것들은 지혜와 지식, 용기, 인간성, 정의, 절제, 초월성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덕들의 표현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슬기로움이 포함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고 볼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들은 모두 상황 파악과 그것에 따른 옳은 반응이다. 지혜, 그리고 지식은 그것 자체가 옳은 상황파악과 직결된다. 우리는 지혜와 지식을 기반으로 상황을 옳게 파악한다. 용기, 인간성, 정의, 절제, 초월성은 이성의 상황파악에 따라서 옳은 행동, 혹은 생각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이 개인에게 주어졌을 때, 그 상황을 온전하게 파악하고, 그것에 따른 옳은 행동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면 옳은 행동을 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상황파악만 하고 옳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상황의 부름을 받되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오히려 더욱 부덕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에는 성격의 덕에 따른 일종의 동인motivation 이 따라야 한다. 이전 챕터의 ‘유덕함’ 의 맥락에서 계속 강조했듯, 그 목적은 유덕함의 가치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목적성이 있는 행동은 온전한 유덕함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을 파악하는 지식 혹은 지혜와 그 올바른 동인을 모두 포함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슬기로움은 다른 덕에 우선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슬기로움을 생각하면서 든 생각은 동양의 ‘중용’ 과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것이다. 옳은 상황 파악과, 그것에 맞는 동인을 갖게 되는 것은 일종의 ‘중용’ 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용’ 과 아리스토텔레스의 ‘mean’ 을 생각함에 있어서 공통적인 부분이지만, 둘 모두 일상적인 언어의 사용에서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 그것은 ‘적당히’ 혹은 ‘가운데’ 라는 의미에서 나온다. “적당히 해” 라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썩 잘하지도 않는,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는 그저 그러한 수준을 의미한다. 이것은 “중간만 하면 되지” 라는 말에서도 그렇다. 둘 모두 일상의 언어 사용 속에서 잘 하지도,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는 ‘남들 하는 만큼만’ 과 같은 뉘앙스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 둘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그러한 것이 아니다. 적당한 것과 가운데라는 의미는 모두 상황에 따른 것으로, 단순히 더해서 반으로 나누는 평균적 중간이 아니라 ‘시중時中’ 을 의미한다. ‘中’ 의 의미는 때를 뜻하는 ‘時’ 와 합쳐짐으로써 더욱 명확해 진다. 그것은 양 극단의 평균을 내는 중간이 아니라, 상황을 고려해서 가장 알맞은 것을 행하는 ‘中’ 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mean’ 역시 그렇다. 상황이 요구하는 것이 극도로 용감한 것이거나, 극도의 절제가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을 그렇게 행하는 것이 바로 ‘mean’ 이다. 그러한 이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슬기로움은 곧 동양의 ‘시중’ 과 연결된다. ‘상황에 따른’ 이라는 말이 애매할 수도 있지만, 애매한 만큼 모든 상황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을 고려하는 슬기로움이야말로 이 챕터에서 열거된 여러 가지 일상적인 덕에 상위적이며 더욱 핵심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Question 2. Do you think would be better off if you did not take responsibility when called on to do so?
이 질문은 넌센스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책임감’ 이라는 덕은 고대에는 없었던 덕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고대에는 개인이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사회가 너무나도 복잡해져 버렸고, 그것을 통해 너무도 많은 역할들이 생겼다. 그로 인해 한 사람이 맡게 되는 역할의 부담이 너무도 커져 버려서 ‘책임’ 이라는 말의 의미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러한 원인에서부터 ‘책임을 피하면 좋지 않겠느냐?’ 하는 이러한 질문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앞에서 서술했듯 책임은 역할과 직결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는 곧 자아와 연결된다. 어떤 역할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바로 그 역할에 따르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개인의 사회적 자아는 그 역할들의 복합체로써 형성된다. 한 개인이 본인을 표현할 때 우리는 어떠한 방법을 쓰는가? 우리는 주로 본인이 맡고 있는 역할들을 열거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부모님의 아들이며, 경희대학교를 다니는 학생이자, 동아리의 부기장이다. 그것은 본인이 지고 있는 책임들을 열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곧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국가에 부끄러운 행위를 하지 않으며,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 학생으로써 열심히 공부하고, 동아리의 부기장으로써 여러 친구들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책임을 지고 있음으로 해서 내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책임이라는 것은 일단 절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 속에서 본인의 위치를 규정지어주는 것으로, 자아 형성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역시 첫 번째 질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적당한’ 수준이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책임감을 가지는 것도 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슬기로움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슬기로움은 상황을 옳게 파악하고, 그것에 따른 올바른 행위를 하는 것이다. 책임감의 경우에는 본인에게, 그리고 상황에 맞는 수준의 책임감을 갖고 그 책임을 올바르게 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역시 여기서도 ‘적당히’, 그리고 ‘중용’ 이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과도한 책임감을 갖게 되는 것은 그것에 대한 과도한 부담감을 갖게 한다. 그 과도한 역할을 어떻게든 다 해내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아의 붕괴가 올 수 있다. 한편 책임감을 과도하게 갖지 않는 것 또한 문제가 된다. 그것은 어떤 역할도 맡고 있지 않거나, 혹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곧 자아의 빈곤함으로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개인은 본인에게 맞는 수준의 역할을 가지고,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자아를 유지해 나간다. 이 질문이 넌센스적인 부분이 있다고 말한 것은 이것 때문이다. 책임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아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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