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윤리학] 생명은 경외감의 대상인가, 안락사 문제, 유전자 연구는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가?

SGZ 2013. 3. 9. 00:13




Question 1. Why do you think life should be an object of reverence?

일단 질문을 보고 문득 들었던 생각은 경외심의 대상을 ‘~해야 한다’ 는 의미의 단어인 should 로 말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내 이해가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경외심 이라는 것은 존경심이나 동정심과는 달리 특히 감정에 관련된 것이다. 앞 챕터의 내용에 의하면, 경외심의 대상은 인공물도 포함한다. 여기에서 인공물이라 함은 위대한 그림이나 아름다운 음악과 같은 것이다. reverence 를 경외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과연 그러한 예술품들에서 감명을 받는 것 역시 유덕한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예술 작품으로부터 감명을 못 받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덕한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나는 유명 예술 작품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예술 작품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역사와 인류 문화의 맥락에서 그러한 예술품들의 가치를 지극히 인정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나는 경외심을 어떤 감정적인 ‘감명’이라기 보다 가치에의 ‘인정’으로써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의 챕터에서 언급된 바에 의하면 경외심의 대상은 놀랍고 중요한 것이며, 또한 동시에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것이다.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생명은 명백히 그러한 대상이 될만하다. 그러한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굳이 종교적인 설명을 빌릴 필요도 없다. 주위의 생명체를 보자.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함 속에서 또 훌륭하게 하나의 전체적인 체계를 유지하는 생명은 참으로 놀라운 존재가 아닌가.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생명에 대해 우리는 많은 부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많은 부분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또한 교재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개별 생명체들이 모두 놀라운 확률적 가능성들을 거쳐서 현재 살아 있는 것이라는 주장 역시 받아들일 만 하다. 뿐만 아니라 역사, 자연, 가치, 자유 등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생명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사실 우리는 매 순간 감사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생명에 대한 개념은 그 자체로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조금 더 이야기를 진전시켜 나가기 위해서 ‘생명' 에 대한 나의 개념을 더욱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듯 싶다. 그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신진대사로 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 의 핵심적인 부분은 '의식' 이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 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있다’ 는 것에는 자유, 자율적인 선택, 욕망과 같은 여러 개념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러한 여러 개념들을 관통하는 개념은 '의식'이다. 의식이 없으면 자유도, 자율성도, 욕망도 있을 수 없다. 살아있다는 것을 단순한 어떤 대사의 연장으로 본다면, 컴퓨터나 사람이 정해놓은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들도 살아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것들을 작동한다고 하지 살아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살아있기 위해서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생명’ 이라는 개념은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인 단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단계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Question 2. How do you think a virtue ethics approach might consider the issue of euthanasia?

앞에서 말한 생명의 이해에 따라, 나는 안락사는 용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배운 것을 끌어들여서 이야기 해보자. 네 번째 챕터에서 리쾨르는 윤리적인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것의 근본적인 목적인 ethical aim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그 목적에 부합하는지를 고려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서술했다. 리쾨르가 주장한 윤리학의 목적은 잘 사는 것, 남들과 잘 사는 것, 정의로운 제도 속에서 잘 사는 것으로, 결국 그것은 '잘 사는 것' 이다. 그렇다면 '잘 사는 것' 이란 무엇인가?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 내가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잘 사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남은 생애를 끊임없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질병이나 상해로 아파 본 사람은 알겠지만,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명확한 의식을 유지한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살아있다’ 는 것은 의식과 직결된다. 제대로 된 의식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은 제대로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잘 살 수 없음이 명백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까지 '잘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존엄성에의 인정' 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삶을 영위하라고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 일까. 그것은 나에게 방향성을 잃은 주장으로 보일 뿐이다. '생물학적' 으로는 살아있지만, '정신적으로' 살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락사가 허락되어야 한다.

다만 그것에는 엄밀한 조건들이 따라야 할 것이다. 본인의 나약함 때문에 삶을 포기하려고 하거나, 혹은 이 세상을 어느 때나 떠날 수 있는 가벼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안락사는 절대 허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의식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따르면서, 그것을 벗어날 일말의 희망이 없는 병에 걸린 환자처럼 어떠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만 적용되어야 한다.


Question 2. Do you think that scientific research into the genetic bases of life is an offence against reverence? Give reasons for your answer.

유전자 연구는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가? 라는 질문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겠다. 유전자 연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는, 아마도 생명의 존엄성이 신으로부터 온다고 믿는 사람들의 것으로, 그것이 신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주장이다. 일단 나는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에서, 그들의 주장은 그들의 믿음이 기반하는 창조론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신은 분명 인간을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일진대,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나뉘어 있다면 어찌하여 신은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을 부여했단 말인가? 인류의 능력과 가능성을 한계 지으려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딱히 이야기할 가치가 없어 보인다.

유전자 연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두 번째 입장은 그것의 현실적인 활용을 우려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생명은 어찌 보면 나고 죽는 것에, 또한 그것이 불확정적이라는 것에서 큰 존엄성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유전자 연구를 통해 그 구조가 모두 밝혀지고 마침내 조작마저 가능하게 된다면 그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위협할 가능성을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입장에는 일정 부분 공감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대해 나는 원론적인 입장과 현실적인 입장의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일단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유전자 연구’ 와 ‘유전자 연구의 활용’ 은 분명히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유전자 연구를 통해 얻어지는 우리의 능력은 일종의 ‘도구’ 로 볼 수 있다. 도구 자체는 윤리적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문제는 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르는 것이다. 그 도구가 어떻게, 선하게 또는 악하게 쓰여질지는 그 도구를 사용하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아직 어떻게 쓰일지 알 수 없는 유전자 연구 자체가 생명의 경외로움을 해치는 것이라는 주장은 ‘도구 그 자체’ 와 ‘도구의 사용’을 혼동하는 데서 온 결과로 파악된다. 다음으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이미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시대적 조류라는 것이다. 유전자 연구는 상당한 가능성을 지닌 분야이다. 이는 자본주의적인 측면에서 다시 말하면, 천문학적인 돈이 될 수 있는 분야라는 말이다. 신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시대에서 그러한 기술을 선점하는 것은 일종의 전쟁이다. 실제로 유전자 연구는 많은 국가들에서 국비를 지원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에서 그것이 생명의 경외로움을 해치는가 아닌가 논의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해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또 그 흐름을 막을 방법이 있는가? 지금 이야기해야 할 것은 그것이 경외로움을 해치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언젠가 그 위험한 도구가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을 어떻게 안전하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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