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동양철학에 관한 분석적 비판>을 읽고, - 이것은 비판인가 비난인가 -

SGZ 2013. 3. 9. 00:39





보통 사람들에게 '철학' 이라고 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은 무엇인가? 으레 그것은 동양의 것이 아닌 데카르트, 칸트, 혹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서양의 사상가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대한민국은 동아시아, 그것도 아시아 문화의 큰 축을 이루는 중국 문화권에 속한 나라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에게 서양의 사상이 동양의 사상보다 더욱 익숙한 것일까? 혹 그것은 동양에는 서양의 그것만큼 탁월한 철학이 없기 때문인가?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철학을 더 공부한 입장에서 위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No' 이다.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의 차이는 '옳고 그름' 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서양 철학은 나누어 분석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반대로 동양 철학은 통합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전체로써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비유를 하자면 서양 철학은 나무를 파악할 때 개별 나무를 신중히 들여다 보고, 뜯어보는 반면, 동양 철학은 전체 숲 속에서 나무의 존재 의의를 파악한다. 그것이 내가 느낀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의 다른 접근 방식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서양철학, 동양철학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할 한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인류가 철학적 진리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철학이 진리로 성립되는 순간, 다른 철학은 모두 죽은 철학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여전히 세상에는 여러 가지 철학들이 다투고 있다. 그러한 한에서 지금, 우리의 철학은 모두 가설이자 이론이다. 세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이다. 철학 역시 이렇게 세상을 설명하려는 이론의 일종임을 인정한다면, 얕게나마 동양과 서양의 철학을 모두 배워온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동양철학은 서양철학에 비교해 설명력에서는 뒤지는 점이 없다. 서양 철학이 개별적인 존재의 설명에서 우월하다면, 동양철학은 그 개별적인 존재들의 관계를 더욱 잘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질문들의 답은 서양 철학보다는 동양 철학에서 더욱 풍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접근 방식과 분야에서 차이가 있는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은 다른 것으로 양립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두 철학 모두 우리가 사는 같은 세상을 설명하는 한에서, 어느 지점에서는 화해가 필요할 것이며 그것은 가능해야만 한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는 필자인 것 같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책 자체가 꽤나 방대한 논의들을 다루고 있어서, 나는 1장과 2장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성선설은 내가 평소에 매우 인상 깊게 생각하고 있던 주장이었고, 2장의 내용이 공교롭게도 우리가 한 학기 동안 배워온 사단과 칠정을 논하는 부분이라서 이렇게 정한 것이지 절대 앞부분만 읽고 쓰는 감상이 아님을 알아 주셨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책은 전체적으로 서양의 사상과 동양의 사상을 두루 공부했다고 하는 필자가 서양의 분석 철학적인 관점에서 동양 철학을 비판하는 구조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 가면서 그 비판의 자세가 꽤나 균형되지 못하다고 느껴졌다. 비판하는 서양 철학자는 있지만 동양철학의 대변인은 없는 책의 내용을 고려하여, 나는 건방질 수도 있지만 감히 공격에 대한 재 반론을 해보고자 한다.

일단 1장-맹자의 성선설 부분을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맹자의 성선설은 ‘유자입정’ 의 상황을 통해 설명된다. 그 상황은 이렇다. 어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 곧 목숨을 잃는 위험한 상황에 닥친 것을 본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그 아이가 아는 아이건 모르는 아이건, 보는 사람이 악인이건 선한 사람이건 간에 마음 한 켠에 측은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그 측은한 마음은 인간 공통의 것이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는 것이라면 그것은 응당 인간의 어떤 ‘본성’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마음을 측은지심, 곧 인간의 본성인 '인' 의 발현으로 보았고, 그것이 맹자가 주장하는 성선설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필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맹자의 주장을 비판한다. 그의 주장은 아래와 같다. 

주장1. 어린아이가 지금 막 우물에 빠지려 한다 해도, 나는 그 어린아이와 별 관계도 없고 또 구해주기 귀찮아서 그저 흥미롭게 바라만 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나는 그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질 것인지 내 친구와 내기를 걸 수도 있고, 이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기를 은연중에 바랄 수도 있다.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는 나는 인간이 아닌가? 분명히 나는 '인간' 이지만 아마 '도덕적 인간'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맹자가 제시한 논증의 전제를 경험적 명제로 해석한다면, 맹자의 논증은 건전하다고 할지라도 타당하지는 못하다. 그것은 기껏해야 도덕적 인간의 선성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필자의 첫 번째 주장을 보고 덧붙이고 싶은 말은, 그가 맹자가 가정한 상황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2010년도 2학기에 이상돈 교수님께 들은 '동양 철학의 기초' 강의에 의하면, 맹자의 유자입정의 상황을 가정할 때 한가지 중요한 점은 바로 '갑자기' 이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맹자가 이야기하는 유자입정의 상황은 갑자기 벌어지는 상황이다. 다시 말하면, 그 상황에 대해 미리 계산을 하고, 그 아이에 대해서 내기를 하고, 그 아이가 내가 아는 아이인지 아닌지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사이에 그러한 상황을 갑자기 보는 것이다. 반면 필자가 '경험적' 이라고 주장하면서 드는 상황의 예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구해주기 귀찮다고 벌써 계산이 된 상황, 혹은 심지어 친구와 내기를 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맹자가 제시한 상황과 어긋난다.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맹자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필자의 첫 번째 비판은 형편 없다고 생각되지만, 두 번째 비판은 그것보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이렇다.

주장2. 이강수가 지적하듯이 "맹자는 인간 본성을 인의예지로 보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인의예지를 갖추고 있지만 단지 자각을 못할 뿐이라고 보고" 있다면, 내부를 응시함으로써 만물의 이치나 진정한 자아의 본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각의 미흡함을 보여줄 뿐이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반응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맹자의 주장은 결코 반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맹자의 주장을 논박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바로 미흡하고 불충분한 자각의 결과이다.

이러한 필자의 비판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 인간의 본성을 표현하는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이 있고' 그 있는 인간들의 어떤 공통적인 본성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필자는 맹자의 방식이 '선한 것이, 곧 측은 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 임을 먼저 규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의 특성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이라고 맹자 스스로 규정지어 버렸다는 말이다.  그렇게 규정을 해 놓고 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단지 본성을 발견하지 못한 부족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맹자의 성선설은 어떤 비판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실로 내가 느끼기에도 날카로운 지적으로 필자의 지적에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그의 비판을 오롯이 받아들이기 전에 한가지 필자에게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의 주장대로 맹자의 인간관이 인간을 선-정의 하는 것으로 잘못 되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은 인간의 정의에 대해 어떤 것을 제시할 수 있는가? 내가 한가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비판을 할 때는 그 비판의 대상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대안을 준비해 놓은 뒤에 비판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과 토론의 결과로, 대안과 비판의 대상 간에서 무엇이 더 낫다던가, 둘 다 옳다던가, 혹은 둘 다 그르다던가 하는 어떤 합의점이 도출되는 것이 올바른 토론과 비판의 자세이자 목표이다. 토론과 비판의 긍정적 기능은 그러한 과정을 거침으로써 오는 것이다. 그러나 교재에서는 인간의 본성, 혹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정의에 대한 어떤 대안도 제시되지 않는다. 필자가 실제로 '인간' 에 대해 어떤 심오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책 속에서 그의 주장은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나의 얕은 지식 기반에서 이루어지는 주장이기 때문에, 틀린 이야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오류 가득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편 두렵기도 하지만, 관련된 맥락인 것 같다는 판단 하에 한번 내 입장을 피력해 보겠다. 자, 맹자가 자의적인 정의를 내림으로써 오류를 범했다는 '인간' 이라는 개념을 한번 살펴보자. 먼저 인간의 공통적 특성을 찾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아마 그것은 ‘인간’ 이라는 것의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할 터이다. 그래야 그것들의 본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공통적이고 내재적인 특성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인간’ 이라는 것은 실체가 고정되어 있는, 다시 말해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럴 수 없는 유동적인 것인가? 예를 들어보자. 눈이 세 개인 사람이 태어났다. 그는 인간인가 아닌가? 날개를 달고 있는 사람이 태어났다. 그는 인간인가 아닌가? 개의 외형에 인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돌연변이가 태어났다. 그는 인간인가 개인가? 또 인간의 외형에 개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돌연변이가 태어났다. 그는 또 인간인가 개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분명히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인간' 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는 반증이다. 경계가 명확하게 지어져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 명확한 경계를 공유하는 ‘인간’ 이라는 개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기하학적 개념과 같은 것은 그러한 상대성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삼각형은 ‘세 개의 직선으로 이루어진, 세 내각의 합이 180도인 도형’ 이라고 분명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 이라는 개념은 내 생각에 절대 그러한 방식으로 명확하게 정의가 불가능하다. 개념의 변두리 부분으로 가면 그곳에는 반드시 불일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맹자의 성선설을 옹호한다. 굳이 어딘가에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범주를 나눠야 한다면, 맹자의 성선설이 나에게는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물에 곧 빠져 죽을 어린아이를 보고 아무 측은함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않냐고, 그런 사람도 사람은 사람인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나는 필자에게 단호히 말하고 싶다. 나에게 그러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모습을 한 괴물이다.

뒤이은 2장에서는 우리가 강의를 통해 배운 사단칠정론에 대해 논의가 이어진다. 앞의 1장에서보다는 비판의 논조는 조금 덜해진 느낌이라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일단 그는 사단과 칠정을 ‘정’ 이라는 것에 의거하여 ‘감정’으로 파악하였을 때 시비지심과 사양지심을 감정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던진다. 특히 시비지심이 문제가 되는데 그의 의견은 이렇다.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어떠한 감정적 상태를 수반함이 없이 차가운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이러한 이성적인 시비판단에 수반되는 감정들도 기껏해야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도덕적 시비의 판단조차도 도덕적이지 않은 인지적 판단을 요구하고, 이 인지적 판단을 한다는 의미에서 시비지심은 더욱 분명하게 감정적 상태와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비지심은 ‘心’ 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일종의 감정이다. 시비지심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다. 옳고 그름을 가린다는 것은 곧 판단이다. 판단은 감정적 상태를 수반하지 않을 수 있는, 감정적이라기보다 이성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판단’ 을 의미하는 시비지심이 사단과 칠정이라는 ‘정’ 의 분류에 포함되는 것은 이상하다. 이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 주장을 읽으면서 일단 ‘心’ 을 ‘감정’ 으로 치환하는 것 자체에서 일단 의미의 왜곡이 어느 정도 일어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점은 일단 제쳐두고라도, 그의 의견에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시비지심을 ‘판단’ 이라는 것의 총체로 생각하여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시비지심을 ‘판단’ 이라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가? 나는 시비지심을 ‘판단’ 의 총체로 보기보다는, 그 판단을 하게 하는 동인(motivation)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시 말해,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 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리려 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시비지심’ 이라는 말을 고찰할 때 ‘心’ 이라는 말을 썼다면 그렇게 쓴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지, 일단 그것을 ‘판단’ 이라는 다른 말로 치환시켜놓고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독단적인 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필자의 태도는 뒤에서도 꾸준히 나타난다. 그는 42페이지부터 한 페이지 반만에 사단과 칠정의 문제를 이성과 감성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그 과정은 참으로 간단하다.

(인용문) 심성의 경우 리는 대체로 이성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중략)기는 육체적인 것, 본능적인 것을 뜻하므로 심성의 경우 감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흥미롭게도 윤사순은 리는 이성적인 것으로, 기는 감성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 리와 기가 각기 이성과 감성을 나타내고, 리와 사단, 기와 칠정이 서로 짝을 이루는 것이라면

 사단과 칠정의 문제는 결국 이성과 감성의 문제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 역시 사단과 칠정을 잘 모르지만 얼핏 생각하기에도 사단과 칠정은 그렇게 이성과 감성의 문제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감히 측은지심이 단순히 이성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쉽게 단순화될 수 있는 개념이 사단이고 칠정인가?

  필자는 책의 시작 부분에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다고 서술하면서 시작했다. 언어분석철학을 전공 했고 동양철학에도 지식이 있는 철학자의 논증이라. 내심 상당히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방식이라면 서양 철학의 틀에 동양 철학을 끼워 맞춰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파악한 필자의 작업을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동양 철학적 개념을 어떻게 서양 철학의 언어로 치환할까 이리저리 고민한다. 치환하는데 정당성을 주는 유용한 부분을 인용한다. 주로 원문은 아니고 인용문의 재인용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동양 철학적 용어의 풍부하다면 풍부하고 모호하다면 모호한 특징들은 모두 재단되고, (비교적)명료한 서양 철학의 언어로 치환된다. 그리고 그 치환된 바가 서양 철학의 문법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아쉽다. 내가 생각했던 동양과 서양의 화해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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