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일상/etc.]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과 넌센스

SGZ 2012. 9. 21. 02:24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영국의 수학자이자 작가인 루이스 캐럴이 1865년에 지어낸 동화이다. 이후 이 동화는 현 세대까지 대표적인 동화로 꼽힌다. 나도 역시 이 이야기를 어렸을 때 읽어 본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다지 특별하다 느낄 것은 없었는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화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고로 교훈적인 내용, 그리고 간단한 서사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헌데 동화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다른 동화들과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 대체 이 이야기가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기에 동화임에도 불구하고 해석이 필요하며, 또한 들뢰즈, 마틴 가드너 같은 철학자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일까? 무려 세계적 명문인 옥스포드를 졸업한 수학자가 쓴 동화라고 하니 내포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정경대 에서 발견한 낙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다른 동화들과 차별화 되는 한가지 부분은 위에서 쓴 나의 동화에 대한 생각에서 한가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동화라고 함은 교훈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 문장에 나타난 동화에 대한 생각에 동화는 교훈적이어야 한다라는 당위적 요소는 들어가지 않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동화는 명료한 교훈적 내용을 지녀야 한다라고 당위적인 요소를 집어넣어서 생각하게 된다. 그 당위적 요소들이 옳고 그른 문제를 떠나서, 어떠한 것의 정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 안에 내포된 당위적 요소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그러한 것들의 예로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와 같은 것이 있다. 학생은 경제적 활동보다 학업을 주된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상식적인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는 학생이니까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진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믿음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리일까? 수업을 들으러 간 강의실에서 한 낙서를 발견했다. 낙서의 내용은 학교 공부해서 남는게 도대체 뭐야?’ 라는 내용이었다. ‘학생이니까 넌 공부해야 한다라는 한 명제로 이러한 질문들을 모두 무마시키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다. 이렇게 우리가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당위들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심의 여지들이 존재한다.

다시 앞의 동화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동화의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동화는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관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런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았다. 마침 여자친구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그렇다면 그 동화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하고 물어보았다. 여자친구는 역시나 대답을 하지 못했고, 생각해보니 그러한 부분은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교훈적인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동화는 쉽고 단순 명료한 서사구조를 가지며 교훈적이어야 한다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났다.

선입견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선입견을 벗어나기 위한 벗어남은 무의미한 반항일 따름이다. 그러나 위대한 나라의 앨리스는 검증받은 바가 있다. ‘동화는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상식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한세기 반이 지나도록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로 살아 남았다. 좋은 동화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교훈이 없지만 훌륭한 동화인 앨리스 덕분에, 이제 동화는 굳이 교훈적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라는 상식을 깨면서 나왔고, 백남준은 캔바스는 종이여야 한다는 상식을 깨고 스크린을 미술의 도구로 사용했다. 이렇게 위대한 변화, 위대한 업적은 상식 혹은 기존의 체계를 깨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점이 포스트 모더니즘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접점을 찾아볼 수 있는 지점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1960년대에 이르러 인간의 이성을 맹신하는 근대적 사고에 반하는 시대적 이념이다. 다시 말하면, 포스트 모더니즘을 근대적 상식, 체계를 거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역시 동화에 대한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 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격을 띠는 지가 더욱 명확해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도 거의 한세기 전인 1865년도에 지어진 포스트 모더니즘적 성격이 엿보이는 동화이다. 그 점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시대를 앞서가는 동화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특이점은 바로 넌센스이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는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과 기묘한 말장난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문화주의 학자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주장을 빌려보자. 그에 따르면, 우리가 접하는 텍스트는 정서의 구조를 거쳐 인식된다. 정서의 구조란 일종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틀이다. 윌리엄스는 아마도 「앨리스」 시리즈의 세계적 흥행을 놓고 그것이 보편적 인간의 감정의 구조를 건드린다고 분석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 구조가 체험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에서 어떤 체험을 하길래 앨리스의 세계를 즐기게 하는 감정의 구조를 갖게 되었는가? 나는 그것을 현실의 부조리함이 아닐까 한번 생각해 보았다. 문학가 알베르 카뮈는 세상과 인간의 존재를 부조리한 것으로 파악했다. 잠깐만 생각해 봐도 세상에 부조리한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지구 어느 곳에서는 굶어 죽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어느 곳에서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가 고민이다. 나쁜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하지만 왠지 오히려 떵떵거리고 사는 것 같다. 논리가 통하는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상을 논리적인 것이라 믿고 이성의 틀로 분석하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닌 세상의 일면일 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렇게 세계적으로 성공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야기 속의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 풀 수 없는 수수께끼,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한 말장난들이 우리의 부조리한, ‘넌센스적인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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