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일상/etc.] 거울 나라의 앨리스

SGZ 2012. 9. 21. 01:51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어머니를 쫓아서 외출을 하면 딱히 특별한 무엇을 하지 않아도 설레고 모든 것이 신기해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기분은 얼마 지나지 못해 사라졌다. 세상은 신기하다기 보다는 특별할 것 없는 일들, 반복되는 일상들로 채워졌다. 뒤늦게 도착한 마틴 가드너의 주석이 포함된 「거울 나라의 앨리스」 를 읽었다. 한번 죽 읽고 난 느낌은 어리둥절함이었다. 비록 주석을 읽었다 할지라도 그 많은 비유와 내포는 내가 이해하기엔 조금 과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읽으면서 과거의 그 아련한 느낌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한 번 머리 속에 그려보면서 상상력이 자극되는 것이 느껴졌다. 앞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의 감상에서와 같이  어떠해야 한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난 동화이기에 이렇게 상상력의 자극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모순되지만 주석을 읽고 나니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기 보다 성인들을 위한 동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라면 이렇게 복잡한 내포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므로.

             주석을 읽으면서 조금 과한 해석이 아닌가 싶은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5장의 작은 가게에서 앨리스는 보려고만 하면 옆으로 살짝 위치를 옮겨서 절대 볼 수 없는 물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 부분의 주석은 양자역학에서의 전자 혹은 미세입자와 관련 지어서 설명을 해 놓았다. 발상이 기발한 것은 인정하지만 과연 후대의 아인슈타인이 세워놓은 양자역학의 체계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해석은 해석일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텍스트일지라도 개인적인 배경에 따라 와 닿는 것은 천지차이가 아닐까? 특히 앨리스 시리즈와 같이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이라면 더더욱. 그러한 측면에서 주석을 바이블로 받아들이며 아 나의 이해력이 이렇게 부족하구나…’ 하고 생각하기 보다는,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써 부끄럽지만 마틴 가드너가 아닌 내가느낀 바를 담담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일단 루이스 캐럴의 인생에 대한 통찰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5장에서 앨리스는 배를 타고 아름다운 골풀 수초를 발견한다. 앨리스는 아름답게 빛나는 골풀을 꺾으려고 한다. 손이 닿는 곳 너머에는 더욱 더 아름다운 골풀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 앨리스의 손은 닿지 않는다. 앨리스는 아쉬운 대로 가까이에 있는 골풀들을 뜯으려고 한다. 그러나 꺾인 골풀들은 그 순간부터 아름다움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앨리스는 그 사실 자체마저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인간이 삶에서 흔히들 저지르는 실수의 비유를 느꼈다. 현대는 욕망의 시대라고들 한다. 자본주의적 질서는 개인의 욕망을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의 발현이 마치 인간의 미덕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사실 욕망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에 결핍을 내포한다. 소유한 것을 욕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욕망할 수 있는 것은 가지지 못한 것뿐이다. 이렇게 욕망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앨리스가 골풀을 꺾는 모습과도 일치한다. 앨리스는 소리친다. “가장 예쁜 꽃이 언제나 가장 멀리 있잖아!”. 그러나 과연 멀리 있는 골풀이 진정 더욱 아름다운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물가에 있는 풀은 멀리 있는 풀이나 가까이 있는 풀이나 비슷비슷하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아름다운 풀들이 멀리 있었던 것이 아니라, 멀리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 아닐까. 또한 꺾은 골풀들은 즉시 아름다움을 잃고 앨리스는 그것에 대해 잊어버리고 만다. 이 부분을 통해서는 가진 것의 소중함은 금세 잊어버리는 인간의 특성을 루이스 캐럴이 꼬집은 것이 아닐까.

             다음은 꿈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의 뒷면에는 앨리스를 「매트릭스」에서「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환상과 상상력의 효시라고 소개했다.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내용을 읽어보면서 어째서 그러한 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매트릭스」는 내가 대단히 재미있게 본 영화 중 하나다. 영화의 배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사실은 가상현실의 세계라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가상현실의 세계는 마치 꿈과 같은 세계인데, 그 세계는 여러 다른 사람들의 꿈과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 세계관의 모티브가 된 듯한 꿈으로 연결되는 세계의 개념은 앨리스 에서도 역시 찾아볼 수 있다. 4장에서 트위들디와 트위들덤은 앨리스에게 너는 빨간 왕의 꿈에 나오는 존재에 불과하니까!” 라고 말한다. 또한 글의 마지막을 맺는 시에서 역시 삶은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라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두 앨리스 이야기들에서는 모두 꿈이 꽤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데, 그것은 넌센스적 세계들이 사실은 모두 앨리스의 꿈속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이 꿈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자칫 정신병적인 생각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의문은 그렇게 쉽게 해소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당연하게 현실은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왜 그러한지에 답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꿈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현실과는 다른 법칙들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과 꿈의 인식을 바탕으로 루이스 캐럴은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현실과는 구별되는 것 같으면서 구별하기 어려운 의 세계가 존재했기에 그가 마음껏 상상력을 펼쳐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끝으로 <재버워키> 라는 시에 대한 이야기가 남았다. 소쉬르는 구조주의 철학자로써 언어를 랑그파롤로 구별했다. 그에 의하면 언어와 의미의 결합은 전적으로 임의적이다. 여기서 또 하나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우리의 사고도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상상력 역시 언어의 범위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하체는 말이고 상체는 인간인 신화 속 동물을 생각해보자. 이는 허구의 동물이지만 또한 전적으로 허구는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선행하는 언어와 그에 부합하는 관념이 없다면 그러한 상상 역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루이스 캐럴은 상상력이 마음껏 발휘되는 세상을 구성하면서 이러한 한계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추측하건대, 그러한 언어의 한계를 깨기 위해서 <재버워키> 라는 기존의 언어와는 무관한 시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재버워키> 는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 언어들로 이루어진 시이기 때문에 해석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렸다. 물론 6장에서 험프티 덤프티가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 주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험프티 덤프티는 보로고브를 빗자루처럼 보이는 꾀죄죄한 새를 말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로고브를 상상하며 대머리독수리에 말대가리를 가진 동물을 상상해도 그 누구도 틀렸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것은 의미가 배정되지 않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의 임의적 의미 할당과 그로 인한 한계를 루이스 캐럴은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어찌 보면 루이스 캐럴은 저 옛날부터 현대의 구조주의에까지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읽으면서 나 나름대로 느낀 점을 서술해 보았다. 앨리스 시리즈는 학문적으로 해석한 학자들도 많아서 내가 이렇게 함부로 느낌을 적는 것이 괜찮은 것일지 조차 우려가 된다. 누군가는 비웃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넌센스 작가,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하는 동화 아닌 동화의 작가 루이스 캐럴이 본다면 어떠한 해석을 했더라도 너는 그렇게 읽었구나하면서 웃어주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동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니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 배워서 더 많은 내포를 끌어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한번 책을 펼쳐봐야겠다. 다행히 책의 디자인이 꽂아놓기에도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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