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일상/철학] 이성중심주의, 시각중심주의, 물질만능주의, 인간성 상실에 대한 고찰

SGZ 2012. 9. 21. 00:54





먼저 사람이 되어야 겠다


           현대 사회를 흔히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상실된 인간성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는 어렵. 학기 동안 들은 강의 핵심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바로 인간성 고르겠다. 시각 중심주의라는 주제 속에서 인간성타령은 얼핏 쌩뚱 . 그러나 나는 시각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객관주의의 맥락에서 공통된 특징으로 '인간성의 결핍' 을 보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지점에서야 비로소 인간성 찾을 있었다. 흔히 이성은 인간으로서 꼭 갖춰야 할 주 특성으로 꼽히고는 한다. 헌데 그러한 이성에 방점을 찍는 '이성 중심주의' 를 넘어서서야 인간성을 마주했다니, 무언가 역설적인 느낌도 든다. 그렇다면 일단 시각 중심주의, 객관주의 그리고 이성 중심주의가 어떻게 인간성의 부재를 야기하는지를 논하기에 앞서, 시각 중심주의와 이성 중심주의의 특징부터 짚고 넘어가야 같다.

             가장 먼저 이야기할 시각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의 특징은 세상을 공간적인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제논의 역설 우리들이 무의식 중에 세계를 공간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날아가는 화살은 앞으로 나아갈 없다그리고 속도가 아무리 빠른 아킬레스도 거북이를 앞지를 없다 제논의 역설은 듣고 나면 직관적으로 옳지 않음을 느낄 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들이 지속적인 시간을 분절적인 공간의 틀로 풀어내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베르크손의 간단하면서도 쉽지는 않은 문제 해결을 듣고 나서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그것은 베르크손 문제 해결이 기존의 공간적인 사고 방식을 벗어난, 공간적  자체’ 의 재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은 공간적인 표상처럼 그렇게 분절하는 것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나타낼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 사고방식은 나누고 나누어 그것들의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방식이다. 물질적인 세계에서는 그러한 방식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공간적 사고방식을 물질적 영역, 또는 비공간적인 다른 영역에 까지 적용 시키면서 발생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 역시, 공간적 사고방식을 시간의 영역, 지속의 영역에까지 적용 시키면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자유의지를 의심하는 자들 주장을 요약하 이렇다. 우리 인간과 생명체는 물리적인 세계 속에 존재하므로, 인과관계의 사슬에 엮여있. 때문에 미래의 '결과' 는 결정되어 있는 과거의 '원인' 들에 의해 결정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미래는 모두 결정되어 있다. 얼핏 들으면  말이 되는  주장이다.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하나였다. 세계의 절대적 법칙으로 보이는 인과관계를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에서 부인하는 것은, 자신을 다른 존재자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류의 거만함이자 독단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베르크손의 철학을 접한 뒤에 생각해보니 그러한 인식은 충분히 의심해 여지가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베르크손은 제논의 역설을 해결한 것과 같이, 문제도 틀 자체의 재구성을 통해 해결한다. 공간적 틀을 지속의 틀로 재구성 하는 것이다. 흔히 자유의지의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이 하는 사고방식은, Y 자의 길을 상정하는 것이었다. 갈림길의 선택 지점에서  '다른 길로도 갈수 있었다', 혹은 ' 길을 선택할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는 방식으로 공방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베르크손은 그러한 문제, 자체의 문제점을 짚어낸다. (내가 이해한) 기존의 자유 논의의 문제는 첫째로, 인간의 선택은 그러한 식으로 도식화 없다. Y 자로 그려지는 순간 지속의 표상은 공간적 표상으로 대체된다. 둘째로, 공간과 달리 시간은 비가역적이기 때문에, 선택의 지점으로 시간을 돌려서 돌아가는 것을 가정하는 질문은 자체로 성립할 없다. 설사 선택의 지점으로 돌아갈 있다손 치더라도, 돌아가는 순간에 순간은 전과 다른 순간이 되어 버린. 셋째로, 인과관계는 우리의 생각만큼 엄밀하지 않다. 특히 인간의 정신과 같이 비공간적인 존재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선택을 하고 나서는 선택의 이유를 찾을 있는 같지만 그것은 선택 후에 원인을 추론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베르크손은 시간적인 것을 공간적 방식으로 이해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를 통해 문제의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바깥에 서서 문제 자체의 문제를 해소한다.


             다음으로 생각해본 시각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의 특징은 오직 논리성만으로 세상을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논리성은 언어를 통해서 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다른 의문을 가져볼 있다. 과연 세상을 그렇게 논리적, 언어적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적용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시각과 논리적인 이성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은 것임은 있다. 시각은 인간이 세상을 지각하는 주된 방식 하나일 뿐이다. 예를 들어 박쥐와 같은 경우 인간은 절대로 없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지각하고 인지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의 시각 역시 이렇게 세상을 지각하는 다양한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또한 인간의 논리적 이성은 주로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언어도 역시 결국엔 인간이 만든 것으로 완전하다거나 절대적이라고는 말할 없다. 언어는 세상을 분절하고 분절된 부분들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으로 작동하므로 분절된 사이에는 항상 의미의 공백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맥락에서 우리말의 말도 안돼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말도 안돼라는 말은 주로 상대방이 거짓인 것으로 판단되는 말을 했을 , 혹은 세상에 있지 않을 법한 이야기를 했을 주로 쓰는 말이다. 헌데 표현이 다름 아닌 안돼 라는 사실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세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를 보여주는 같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있는 것이지만 세상에는 언어의 논리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충분히 존재한다. 가지 예로는 역설이 있다. 모든 역설은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지만, 진리를 내포하는 것으로 판단되 역설들이 있다. 예로 10년전의 나는 내가 아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같은 말들이. 앞의 문장은 모두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만 분명 세상의 어떤 측면을 일반적인 문장보다 훌륭하게 설명한. 이러한 문장들은 세상에 언어적 논리성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이렇게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세상 관련하여, 배운 내용 중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그리고 프란시스 베이컨의 추상화 떠올랐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나름의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 논리는 세상의 일반적 논리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특히 이야기에 나오는 <재버워키> 라는 시가 떠오른다. <재버워키>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시로, 기존의 논리적인 언어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라고 있다. 이렇게 논리성이 없는 시를 보고 재미있게도 앨리스는 앨리스는 정말 멋진 같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데라고 말한다. 이러한 앨리스의 반응과 비슷하게 나도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로 구성된 <재버워키> 라는 시를 읽고, 이상하게도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오히려 일반적인 시보다 많았다. 세상이 그렇게 논리적 언어로 근본까지 파헤쳐질 있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재버워키> 같은 무의미한 시가 오히려 더욱 많은 심상을 떠오르게 하는 것, 그리고 세상의 논리와는 동떨어진 논리로 펼쳐지는 넌센스 적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그리고 거울 나라의 앨리스라는 작품이 세계적으로 성공한 동화라는 것은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이 있을까?

              또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추상화들을 접하면서 나는 언어와 논리로 표현할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전에는 추상화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그냥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그려놓은 그림에, 꿈보다는 해몽 격으로 설명을 붙이고 가격을 높여 장사하는 것쯤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회화 예술을 메시지 전달의 측면보다는 기술로써 생각했던 같다. 그러나 이번 학기 동안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을 접하면서 구상화와는 다른, 추상화만의 의미를 조금은 같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림을 통해 무언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 것이다. 구상 화가들은 표현의 방식으로 세상이 반사하는 빛의 재현을 선택한 화가 들이다. 그리고 추상 화가들은 아마도 재현을 바탕으로 하는 표현 방식에서 어떤 부족함을 느꼈기에 추상화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왜 다른 방법을 선택했겠는가? 추상화를 구상화와 비교하자면 추상화는 기존의 언어 문법, 언어 논리를 벗어난 것이라고 있을 같다. 그러한 추상화를 보고 나서 구상화에서는 느낄 없는 깊은 감명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세상에 단순한 언어 논리, 혹은 시각적으로 설명될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내가 느낀 시각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의 특징을 짧게 살펴봤다. 어찌 생각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게 것은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모른다. 생물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생존이고, 인간 역시 생존이 목적인 생물이다. 생존은 , , 같은 외부적인 기본적 욕구가 일단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간을 거치면서, 그러한 기본적 생존 조건의 충족을 위한 전략으로 우리는 시각과 이성만을 중시하게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인문학은 사치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사치라고 하니 왠지 부정적인 어감이 들긴 하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사치가 아니라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것으로써의 사치일 것이다. 그렇기에 삶의 목적이 단순 생존 사람, 단순히 살기 위한 목적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지 않나 싶다. 그러나 단순히 '살기 위한 삶' 이 아닌, '인간으로써, 그리고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성중심주의, 그리고 시각 중심주의를 이야기 하면서 이성과 시각을 비판 하는듯 논조로 글을 썼지만 나는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분명히 좋은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중요하. 시각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 하나이며, 이성이 인간이기 위한 조건 중요한 조건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거기에 중심주의 붙으면 문제가 된다. 위험하고 나쁜 것은 자신이 가진 것 만이 진리이며, 다른 주장들을 모두 틀린 것으로 배척하는 도그마이지 견해 가 위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 견해를 갖지 않는 사람이야 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있다. 인류의 문명이 이성과 시각 덕분으로 지금의 화려한 과학기술을 가지게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삶은 과거보다 편리해졌고, 평균 수명은 거의 가까이 늘어났으며, 생명의 위협도 과거와는 비교할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은 물질의 범위 내에서라면 높은 정확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어느 정도는 믿을 있는 것도 사실인 같다. 물리적, 물질적 영역 내에서 적용되는 이성 중심주의와 시각 중심주의는, 인간 문명의 발달에 원동력이었. 그러나 그렇게 없이 물질적으로 변화하고, 발달하고, 진화하는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의 정신적인 부분들은 물질적 변화를 따라갈 만큼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같다. 우리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 둘러 싸여 살면서 여전히 같은 불행, 혹은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커진 불행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그러한 현상의 가지 원인을 물질적인 영역에 머물러야 물질적인 사고방식, 다시 말해 시각 중심주의와 이성 중심주의적 사고가 정신적 영역, 인간적인 영역으로 침범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질적인 세계에 그쳐야 기계적인 세계관, 객관주의, 과학 제일주의적 관점이 고유 영역을 넘어 인간적인 영역, 정신적인 영역을 침범한 것에 따른 현실적인 결과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일단 번째 정신적 가치들을 과소평가, 왜곡, 혹은 부정하는 것이 있다. 정신적 가치의 부정은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별반 차이가 없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나 짐승이 아니다. 앞의 논의에서 말했듯, 인간은 단순 기계적, 논리적으로는 설명될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성 중심주의적 관점에서는 그런 모든 것을 측정 가능한 방식으로 치환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시각중심주의적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존재하지 않는 다거나 혹은 보이고 측정될 없는 것을 무리 하면서까지 가시적인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본질을 왜곡하는 성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 자유, 정신과 같은 물질적이지 않은 것이 분명 존재함을 느낀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동물들의 특성과는 분명히 비교되는 인간만의 것이며 증명되는 부분이 아니라 직관으로 느낄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시각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적 관점에서는 사랑은 단순 호르몬의 변화라는 수치적인 것으로, 자유와 정신은 인과관계와 과학적 증명을 통해 설명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고는 한다. 이러한 주장은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는 인간의 특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나는 현대 사회의 도덕적 해이, 물질만능주의 같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결과로 발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리쾨르의 <악의 상징> 에서 있듯 짐승과 구별되는 인간의 근본적 조건 하나는 악을 인지하고 또한 구별할 있는 정신적인 능력이다. 정신적인 능력은 어떤 사건을 객관적인 단계에서 주관적인 허물 단계로 끌어올려서 받아들일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세계관은 정신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허물 끌어올리는 것을 방해한다. 부끄러움, 양심과 같은 가치는 이성이나 시각을 통해서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규범이 정신적 사유를 통해 내면화가 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범죄를 저질러서 잡힌 뒤에도 재수가 없어서 잡혔다거나 일반 서민들과는 비교할 없을 정도로 부자이면서 탈세를 저지르는 경우는 요즘 흔히 보이는 세태다. 이러한 현상은 보이지 않는 개인의 정신적인 가치는 마치 없는 것인 치부하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가치만을 있는 것으로 보는가치관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 조건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정신이라면 이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간성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 또 이러한 맥락에서 한 가지 재미있으면서도 애석한 것은, 그들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그러한 짓을 하는 것일 테지만, 그렇게 물질적인 것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많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을 본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보고 돈도 많은 사람이 죽긴 죽나생각하지만 그러한 생각 자체가 물질이 행복을 대변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에 기인한다. 그러나 사실 행복은 물질을 떠나서 어떤 수치적인 것으로도 대변될 없는 정신적인 것이다.

             물질적 가치관이 정신세계를 침범함으로 인해 예상되는  번째 결과는 삶의 방향성 상실이다. 종교는 과학과 분명히 구별되는 영역 차이가 있다. 그러나 헤게모니를 쥔 과학적, 혹은 이성적인 사고방식은 종교의 영역까지 잠식했다. 그로 인해 이성적인 추론의 결과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자들과, 억지스럽게 과학적 논리를 종교에 끼워 맞추려는 양 극단의 사람들이 생겨났다. 과학적인 논문들을 취합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는 ***** 라는 집단을 대표적인 예로  있. 종교의 가장 깊은 곳에는 옳고 그름이 아닌 믿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믿음이 아닌 과학적인 사실이 있기를 바란.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그러한 내용들을 메타포가 아닌 팩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적잖게 놀랐다. 종교적인 교리를 기록한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증명 옳지 않을 뿐더러 가능한 일로 보이지도 않는다. 성경 증명 보다는 비유와 상징으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따지기 보다는 믿어야 하는 책이. 이렇게 종교가 변질 되고, 정신적인 가치가 경시되면서,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물질로 교환될 있는 돈만을 궁극적인 목표로 추구하게 되는, 물질만능주의 풍조가 형성된 것이 아닐까. 결과로 사람들은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고, 풍요롭지만 빈곤함을 느끼는 것 같다.

             지금까지 시각중심주의, 그리고 이성중심주의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한번 생각하고 정리해 보았다. 강의 내용이 포괄적이었고 쉽지 않았던 만큼 내가 쓴 말들이 혹시 궤변일까 걱정스러운 마음도 든다. 그래도 분명히 뭔가 깨달은 점은 있었던 시간이었다. 첫 발표시간에 인간의 사고 역시 두뇌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을 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 때에 비추어보면, 나도 이성 중심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모든 것은 물질적인 것으로 번역이 가능하고, 과학의 발달로 모든 것이 예측되고 정복 될 것이라 믿었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들은 존재한다고 말할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견해가 틀린 것일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솔직히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에 대해, 혹은 시간과 공간의 영역차이에 대해 "알고 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견해가 틀릴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것만으로 충분한 소득이지 싶다. 다른 무언가가 되려 하기 전에 일단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이 있다. 우리 모두는 사람이지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또 어렵다. '일단'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보다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으로써, 이성 혹은 논리 너머에 있는 진정한 인간성이 무엇일까 고민의 필요성을 느낀다. 과제에, 이런 저런 일에 치이다 보니 사놓고 읽지 못한 교재들도 많은데, 학기가 끝나면 여유가 많이 생기는 만큼 시간 내어 평안한 마음으로 한 번 음미해 봐야겠다. 그러한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은 더 인간다운 '진짜 인간' 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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