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 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으로는 ‘동양주의’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지만, 실질적인 의미로는 서양의 관점에 의해 규정된 동양을 의미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오리엔탈리즘에는 동양의 사상을 축소하고 열등한 것으로 본다는 시각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그것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옳고 그른지를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현대 대한민국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내가 판단하기에, 2013 년에 대한민국에서 대학생으로써 살아가고 있는 세대는, 오리엔탈리즘적 동양관을 가지게 될 수 밖에 없는 교육과 환경 속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과학’ 이라는 이름으로 학창시절에 배운 것은 모두 서양의 것이었다. 동양의 사상과 세계관은 ‘윤리’ 라는 과목을 통해 지엽적으로 가르쳐 졌다. 이과였던 나는 그나마도 배우지 못했다. 교육과 더불어 정치경제적인 헤게모니 또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적자생존식 자유주의 경제 체제 속에서, 효율성과 거리가 있는 동양 사상은 우리와 알게 모르게 멀어져 갔다. 그러한 맥락속에서 서양의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동양의 것은 그것과 비교하여 비 과학적이고 신비적인 것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사고방식이 더욱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한의학 역시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얼핏 한의학에 대해서는 이러한 피해가 적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실천적으로 우리는 서양의학과 한의학 양자 모두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이름에는 권력적인 요소가 들어갈 여지가 많다. 예를 들면 의사와 여의사라는 단어가 그렇다. 여의사는 굳이 ‘여’ 의사로 구별하여 부름으로써, 의사는 남자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무의식중에 재생산 되는 것이다. 의학과 한의학이라는 말에서도 그러한 관계가 보인다. ‘의학’ 이라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서양의 의학을 생각하고, ‘약’ 이라고 하면 당연히 서양의 알약을 생각한다. 동양의 것에는 굳이 ‘한’ 이라는 말을 붙여서 한의학, 한약 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사는 곳은 동아시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여의사라는 단어가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짜 의학은 서양의학’ 이라는 고정관념을 재생산 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언어적인 부분에 더불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의학에 대한 이미지 역시 그렇다. ‘한의학’ 이라고 하면 왠지 신비한 느낌이 드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말이 좋아 신비한 것이지 엄밀하게 말하면 비과학적인 느낌이다. 과연 한의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처럼 신비하고 비 과학적인 것인가?
이렇게 알게 모르게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몸의 노래> 는 한의학을 오리엔탈리즘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역사, 철학, 의학을 넘나드는 필자의 풍부한 지식이 배경이 되었기에, 그것들이 고루 섞여서 이러한 사실들을 납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한의학과 서양 의학의 차이는 ‘서양은 합리적이고 동양은 비합리적이어서’ 라고 단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자연환경과 사상적 맥락 하에서 다르게 분화된 것이다.
맥을 판단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한의학만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르게, 서양에서도 촉진은 19 세기까지 가장 유력한 진단법이었다. 생각해보면 응급실에 설치되어 있는 특정 파형을 그리는 심전도 측정기는 맥을 측정하는 것과 상당 부분 유사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같은 맥에 대해 서양 의학은 동양 의학과 그 접근 방법을 달리한다. 서양 사상과 철학은 전통적으로 객관성, 언어적 분절, 다자 속의 일자, 표준화와 같은 것을 중요시 한다. 서양에서 언어적 논변, 그리고 만물에 적용 가능한 기하학이 잘 발달된 것은 위에서 말한 서양 철학의 맥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향은 의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객관적으로 관찰되고 표준화가 가능한 것 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었기에, 맥에서도 숫자로 치환 가능한 맥박수 외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었다.
그러나 동양의 경우 사정이 다르다. 노자의 유명한 말로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이라는 말이 있다. ‘도 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정도로 해석되는 이 말은 앎과 개념에 대한 동양의 관점을 잘 드러낸다. 서양에서는 모든 것을 분절하고, 그 분절한 것을 언어적 개념으로 치환하여 그것들 간의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철학과 사상이 발전했다면, 동양에서 언어적 개념은 말 그대로 말일 뿐이다.
진정한 진리는 개념의 이면에 있는 무엇이다. 그것은 말로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서양의 과학적 세계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언어나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간단한 예를 들면, 개인의 마음 상태는 말을 통해 상대방에게 완전히 전달될 수 없다. ‘100 점 만점에 99 만큼 절망적이야’ 라고 해도 실제로 얼마나 절망적인지 청자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차라리 ‘재입대를 해야 하는 기분이야’ 라고 유비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더욱 와닿는 것이다. 그나마 유비적인 방법도 그 기분을 상대방이 실제로 느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실재와 커다란 차이가 있다. 다만 그것은 상상을 통해 추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동양의 의자들은 인간의 몸, 그리고 질병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명백히 보이는 것은 명백히 보이는 것일 뿐이고, 진상은 그 현상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그것의 이면을 파악하는 것이 진정한 의자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유비적인 방법이 그나마 최선의 것이다. ‘부맥’ 이라는 개념을 을 명확성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왜 ‘하늘로 부풀어 오르는 구름, 느릅나무 깍지가 낙하하는 모습’ 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된다.
동양과 서양의 다른 사상과 철학은 이렇게 맥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서 사람의 몸을 ‘보는 것 seeing’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같은 눈을 사용해서 같은 인간의 몸을 보더라도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서 정말로 ‘다른 것’ 을 보는 것이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서양의 사상은 분절과 엄밀한 인과관계를 중시한다. 서양에서는 이면에 무언가가 존재함을 인정하기 보다는 명석 판명하게 눈에 보이는 것, 그리하여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진정한 앎으로 간주했다. 그러한 사상적/철학적 경향이 해부학이 발달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문제가 있으면 몸을 열어서 눈으로 파악하고, 어떤 기관이 어떤 문제를 유발하는지 그것의 인과관계를 밝혀 내야만 비로소 진정한 ‘앎’ 으로 인정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 ‘보는 것’ 은 서양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역시 앞에서 살펴 봤듯, 동양에서는 직접적인 언어 보다는 유비적인 언어가 어떤 의미에서 실재를 더욱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언어나 현상을 해석할 때 단순 사전적이고 표면적인 의미 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의 몸을 관찰함에 있어서도 그렇다. 한의학적으로 비범한 자는 굳이 몸을 열어서 보지 않아도 그 이면의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자이다. 책의 인상깊은 구절을 인용하면, “해부학의 눈으로 보자면 피부는 안쪽에 놓여 있는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가림막 이었다. (중략) 그러나 중국에서 피부는 특별한 것을 드러내는 빛나는 자리였다.” 동양의 맥락에서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 이면’ 의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구리야마 시게히사의 <몸의 노래> 를 읽으면서, 동양 의학과 서양 의학이 각각 어떠한 사상과 철학이 바탕이 되었길래, 지금 이렇게 다른 모습을 띄게 되었는지에 대해 깨달은 바를 간단하게 서술했다. 그를 통해 ‘오리엔탈리즘’ 적 시각 -동양의 것은 비합리적이고 열등한 것이라는 생각-을 뒤엎을 수 있는 단초들을 찾았다. 그것은 ‘한쪽이 옳고 한 쪽이 틀린’ 관계가 아니라 다른 문화의 다른 철학과 사상 하에서 발생한 ‘다른 의학’ 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다른 역사적,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과연 ‘한의학은 비과학적’ 이라는 오명을 씻겨줄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어 보인다. 나의 판단에 ‘한의학은 의학이다’ 라는 명제는 의심의 여지 없이 옳다. 우리는 몸이 아플 때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치료를 받음으로써 실제로 몸이 낫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의학이라는 것의 목적성이 사람의 몸을 고치고, 더욱 건강한 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이라면 한의학은 분명 의학으로써 존재가치가 있다. 그러나 ‘한의학은 과학적이다’ 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한의학은 과학적인가?’ 라는 질문의 옳고 그름을 따져보기 위해서는 일단 ‘과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선행해야 할 것이다. 감히 정의해 보자면, 나에게 과학은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일관된 시스템’ 이다. 그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들이 어떤 일관된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지에 대해 해명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가령 ‘돌을 던지면 날아간다.’ 는 과학적인 명제로 보이지 않지만, ‘2kg 질량의 돌을 4N 의 힘으로 던지면 F=ma 라는 공식에 의해서 2m/s 의 가속도로 날아간다’ 라는 명제가 과학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단순 현상을 넘어 그 현상들을 관통하는 원리에 대해 설명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한의학에 적용하면, ‘과학으로써 한의학’ 의 부적합성이 드러난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의학에 대한 나의 지식이 매우 얕음을 잘 알아서 주장을 펼쳐나가는데 매우 조심스럽다. 하지만 한의학이 음양오행 사상에 기반한다는 짧은 지식을 바탕으로 서술해 보자면, 한의학은 과학이라고 말하기에는 일관된 체계가 부족해 보인다. 내가 아는 한에서 한의학의 설명 방식은, 어떤 것은 음양오행 중 이러한 성질을 띠고, 어떤 것은 음양오행 중 저러한 성질을 띠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저러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방식으로 알고 있다. 가령 강의 중 들은 내용을 회상해 보면 맥주는 찬 기운이 강한데, 그 이유는 맥주의 원료인 보리라는 작물이 나는 곳이 찬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의학에도 나름의 설명 체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문제는 그러한 설명에 보편적인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설명이 ‘과학적인 힘’ 을 가지려면 그 설명 방식이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F=ma 라는 수식이 과학적인 위상을 갖는 것은, 그것이 보편적인 물질에 일괄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만일 보리라는 작물이 차가운 성질을 띠는 근거가 차가운 곳에서 나는 작물이기 때문이라면, 작물이 나는 곳의 기후가 해당 작물의 차고 뜨거운 것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의학에서 그렇게 명쾌한 기준이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한의학이 왜 과학으로써 부적합한 것인지에 대해 내 나름의 논변을 펼쳐 보았다.‘비과학적’ 이라는 말이 마치 한의학을 부정하는 기분이 들어서 씁쓸하긴 하지만, 한 편으로는 되려 다른 생각이 든다. 굳이 한의학을 ‘과학적’ 인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냐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상당부분 서양에서 도입된 것이며, 유물론적인 색채를 띤다. 명백히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의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은 그것의 존재 양태 자체가 유물론과는 거리가 있다. ‘기’ 라는 개념을 어떻게 물질로써 설명을 하겠는가. 같은 세상에 같은 목적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서양 의학과 한의학은 분명 어떤 지점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꼭 ‘한의학의 과학화’ 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한 ‘과학화’ 의 노력 역시 어떠한 의미에서 ‘오리엔탈리즘’ 적 맥락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가져 보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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