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독일 철학자 사상 정리/요약 (칸트, 피히테, 쉘링,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SGZ 2013. 6. 21. 11:55


니체





칸트

1. 새로운 형이상학

     칸트는 이전의 형이상학이 신과 초월자의 존재를 입증하는 방법에서 잘못된 점이 있었다고 보고 이를 비판한다. 그에게 기존 형이상학의 문제는 이성을 맹신하여 독단에 빠진 것이다. 그런 부분을 지적하면서 칸트는 엄밀한 이성 비판이 선행 되어야만 형이상학이 학으로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형이상학의 역할은 인간이 얼마나 알 수 있는지 그 범위를 확정하는 것이다.


2. 인간은 얼마나 알 수 있는가?

     칸트는 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흄은 극단적 경험론자로 그의 철학을 극복하지 못하면 인간의 지식은 모두 회의주의로 빠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흄에 따르면 인과성이라는 것은 개연성에 불과하며 필연성은 주장할 수 없다.

     칸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험 이전의 선험적인 영역에서 필연성의 근거를 찾는다. 또한 그 지식이 의미를 지니려면 동어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를 주는 종합적 판단이어야 한다. 이러한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지식을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 이라고 한다. 이러한 판단은 수학과 자연과학의 영역에 존재한다.

     칸트에 의하면 인식은 경험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보편적 인식의 형식인 시공간, 범주를 통해 필연성, 객관성을 획득한다. 특히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성의 범주가 있어서 인과적 지식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로써 흄의 회의주의는 극복된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 칸트는 인간 인식의 범위를 경험되는 것으로 한정짓는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세분화해, 감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감성, 받아들인 것을 범주화하는 오성, 인식한 바에 체계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이성으로 나눈다. 여기서 인식을 담당하는 것은 감성과 오성이며, 이성은 인식 된 것에 대한 것이다. 기존 형이상학의 문제는 경험을 넘어선 것에 대해서도 이성을 통해 인식이 가능함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에 의해 주장되는 신과 영혼 같은 것은 인식론적으로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칸트에게 인식이라는 것은 인식 틀에 따라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을 질서지어서 판단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자연의 현상 뿐이다. 현상 배후의 물자체는 인간 인식의 범위 밖에 있다.


3.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자유

     칸트 윤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는 인간이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것은 그의 인과적 자연관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 인과적 자연관이라면 모든 것은 인과관계에 묶인 것으로 인간의 자유도 응당 부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신체적으로 인간은 인과론적 세계에 지배받지만,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측면도 있다고 말한다.

     칸트 윤리학은 의무론적 윤리학이다. 도덕 법칙은 결과가 어찌 되었던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무조건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공리주의적 윤리학과 대립된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 법칙은 이성을 통해서 가능하다. 인식론적으로 이성의 역할은 작아졌지만, 윤리학에서 이성이 아주 중요해 진 것이다. 그러한 도덕 법칙의 예로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 '항상 나의 의지의 준칙이 입법의 보편적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 와 같은 것이 있다. 


4. 신과 영혼의 불멸 요청

     칸트는 인간이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최고선은 행복을 그 안에 함축해야 한다. 칸트는 이 행복을 윤리와 연결시킨다. 칸트는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의 도덕적 의지가 최대한으로 구현될 경우, 즉 최고선의 상태에 이른다면, 당연히 행복을 누려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자연적인 것은 윤리적인 것과 대립되는 것이므로, 유한한 세계 내에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최고선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로서 무한한 신과 불멸의 영혼이 요청된다. 


5. 목적론

     칸트에서 목적론적 사고는 그의 철학 전 체계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인식과 도덕은 서로 다른 것에 기반한다. 즉, 자연적 인과적 필연성과 자유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요소가 상충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통일하기 위해 칸트는 '합목적성' 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한다. 판단은 규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으로 나뉜다. 규정적 판단은 특수가 보편 아래로 포함되는 판단이고, 반성적 판단은 특수만이 주어지고 보편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적 판단이 반성적 판단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칸트에게 아름다움의 감정은 주관적 보편성을 갖는다. 결국 아름다움은 주관적이지만, 우리 주관의 인식 형식에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의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다. 미적 쾌감은 오성의 틀과 상상력이 일치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러한 보편적인 틀에 잘 맞는 것을 합 목적적이라고 한다. 숭고의 감정도 반성적 판단에 속한다. 그 자신보다 큰 것에 대해서 인간은 공포를 느낀다. 그렇게 인간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이성을 통해 수용함으로서 인간은 쾌감을 느낀다. 이 감정 역시 인간 능력과의 대상의 합목적성이 합치를 보이는 것이다.

     자연적 대상과 자연 간에도 합목적성이 존재한다. 칸트는 이를 '객관적 합목적성' 이라고 부른다. 이는 자연 자체의 목적성을 전제로 한다. 자연물은 그 자체가 원인이면서 결과로 해석된다. 이는 바로 자연을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연을 자유의 주체로서 이해함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서 인과적 자연과 자유의 이분법적 논리는 지양되고 통일이 이루어진다.





피히테


1. 주관적 관념론

     피히테는 칸트와 유사하게 철학을 학으로서 정립하고자 했다. 피히테의 철학은 한마디로 하자면 '주관적 관념론' 이다. 피히테에 의하면 사물 또한 주관적 관념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피히테의 철학은 인간의 주관을 진리의 기반으로 삼는 철학적 체계이다. 피히테는 이 주관을 행위의 주체로서 본다. 그 주관을 피히테는 자아라고 표현하는 것이며, 자아의 핵심은 행동이다. 인간은 행동, 특히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인식한다.

     피히테 철학의 제 1 근본명제가 자아의 정립이라면, 제 2 근본명제는 비아의 존재이다. 자아가 의미있기 위해서, 자아의 자유를 위해서 외적 저항인 비아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비아는 자아에 의존적으로 존재한다. 그 둘은 서로 꾸준히 투쟁한다. 여기서 제 3 근본명제가 나온다. 그것은 순수자아는 유한한 자아와 비아 모두를 포괄한다는 것이다. 비아는 능동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피히테에게 철학의 역할은 이 무의식적 자아의 활동을 해명하는 것이다.


2. 윤리학

     피히테에게 모든 자아의 행동은 완전한 자유를 향한 움직임이며, 궁극적으로 도덕적 행위로 수렴한다. 참된 도덕적 행위는 어떤 외적 제약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자연, 즉 비아는 이러한 인간의 도덕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이자 수단이다. 자연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때 인간은 도덕적일 수 있다. 피히테가 제시한 도덕적 기준은 '양심' 이다. 양심 자체는 오류가 없지만, 양심이 소멸해 존재하지 않거나 미약해져서 그 기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3. 도덕과 신

     피히테는 신 역시 윤리적 맥락에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신의 계시가 만약 도덕법칙에 어긋난다면 이는 참다운 계시라고 볼 수 없다. 피히테에게 신은 도덕적 질서의 가능근거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는 피히테를 무신론자라는 비판을 받게도 했지만, 초월적인 신의 지위를 부정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쉘링


1. 자연철학

     쉘링은 주관과 객관, 관념과 실재 사이의 통일을 자신의 철학에 초점으로 둔다. 여기서 그 출발이 되는 것이 자연이다. 쉘링은 유기체적, 목적론적 자연관을 갖는다. 자연적인 단계는 객관의 단계고, 정신적인 단계는 주관의 단계로 모두 자연에 포괄된다. 이 지점에서 쉘링은 주관과 객관, 관념과 실재의 접점을 찾는다.


2. 동일철학

     자연 속에서는 주관과 객관, 관념과 실재가 동일하다. 질료적 측면이 우세가 보이면 실재적 측면이 드러나고, 관념적 측면이 우세를 보이면 정신이 부각되는 것으로 오직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이러한 통일성의 근거는 신이다. 유한자로서는 정신과 자연을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통일성의 근거로서 신이 존재한다. 절대자로서의 신의 자기 현현과정이 만물의 생성이며 절대자 속에서는 대립적인 것이 일치와 통일을 이룬다. 이러한 것을 전제로 진리에 대한 앎은 가능하다. 이는 '지적인 직관' 에 의해 가능하다. 지적 직관은 무의식적이며 신비적인 차원까지도 포괄한다. 지적 직관은 미적 직관의 단계에까지 이른다.


3. 예술철학

     그러한 지적 직관이 나타나는 곳은 예술이다. 쉘링에 따르면 예술 속에서 주관-객관, 관념-실재, 의식-무의식, 개별-보편, 신체-영혼, 유한-무한, 자연-정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쉘링의 철학에서는 예술이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미적 직관이란 유한함 속에서 무한자를 직관하는 것이다. 





헤겔

1. 역사와 이성

     헤겔은 역사를 절대자의 자기실현이자 자기전개 과정으로서, 이 절대자는 곧 정신이자 이성 그 자체라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라는 표제 하에 역사를 이성화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절대자는 자신의 본질을 역사속에서 실현해 가는 과정 속에서 유한자로서의 개인을 매개로 한다. 개인의 의지와 자유를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하나의 발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2.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

     기존의 유한자와 무한자의 대립적인 관계와는 달리, 헤겔에게 그 둘은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무한자는 유한자를 매개로 자신을 전개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유한자가 없으면 결국 무한자도 없어지게 된다. 


3. 절대자의 전개

     역사 속에서 절대자의 자기 전개 과정은 세 단계를 거친다. 첫 단계는 절대정신이 즉자적으로 전개하는 단계이다. 이를 탐구하는 것이 논리학이다. 논리학은 존재, 무, 생성이라는 변증법적 틀 안에서 절대자를 해명한다. 두 번째 단계는 절대자가 자신을 자연 속에서 드러내는 과정이다. 이는 곧 정신의 객관화 과정이다. 세번째 단계는 절대정신이 자신으로 되돌아와 정신으로 실현되는 과정이다. 이는 주관적 정신, 객관적 정신, 절대정신의 세 단계로 진행된다. 주관적 정신은 개인의 정신이고, 객관적 정신은 초개인적인 문화적 산물(법, 제도, 윤리), 그리고 위의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 최고의 단계에 있는 것이 절대정신이다. 철학은 절대정신이 도달하는 최고의 단계로서 여기에서 완전히 자신에로 복귀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1. 표상과 의지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라는 명제 하에 칸트가 미결로 남겨놓은 '물자체' 라는 개념을 다시 끌어온다. 쇼펜하우어에게 물자체는 곧 의지이다. 그에게 세계의 궁극적인 원리이자 근원은 곧 의지이다. 세계의 근원이 의지라는 것은 자신과 자연과 역사를 반성적으로 살펴보면 드러난다. 전 자연은 맹목적 충동과도 같은 의지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이 의지는 곧 '삶에의 의지' 이다. 이성은 최고의 기관이 아니라 이 의지에 봉사하는 보조 수단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비합리적으로 이 의지를 해석한다는 점에서 비이성적이고 초이성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보기 드문 독일철학자이다.


2. 고통으로서의 삶

     의지가 세계의 근원이라며 부단히 의지를 행사하는 것이 인간 삶의 본질적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현실적으로 완전히 충족될 수가 없다. 여기서 인간의 불행과 고통이 시작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의 삶은 비극이다. 자살 역시 삶에의 의지의 한 표현으로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비관주의적, 염세주의적 세계관이다.


3.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의 예술과 도덕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의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예술과 윤리이다. 이는 오직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인간이 무의지적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일차적 통로가 예술이다. 미적인 관조는 의지적 욕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초월해서 이루어진다. 쇼펜하우어에게 완벽한 예술은 음악이다. 인간은 세계의지에서 개별화되었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음악을 통해 인간은 세계의지와 합일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을 통한 해방은 일시적이다. 지속적인 방법은 아예 삶에의 의지 자체를 부정함으로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삶에의 의지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곧 사랑이며, 이의 한 단계가 동정이다. 참된 사랑은 쇼펜하우어에 따를 때 기본적으로 동정이다.  그러므로 쇼펜하우어는 금욕을 중시 여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의지가 궁극적 목표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철학의 궁극적 도달점은 곧 "무의지, 무표상, 무세계" 이다.





니체

1. 독일문화의 쇄신

     니체는 독일문화의 원류를 그리스 정신, 특히 디오니소스 신화를 통해서 찾는다. 과도한 이성주의와 기독교가 독일을 허약하게 만들었다고 진단한다. 


2. 허무주의

     이성주의와 기독교가 불러온 허무주의 위에서 니체는 오히려 허무주의가 허무주의를 역전시킬 수 있는 토대라고 본다. 이성이나 신같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가치가 사라진 만큼, 이제는 개개인이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한다. 이로부터 유한한 인간이면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강한 힘의 소유자로서 인간관이 요청된다. 니체는 이러한 삶의 주체로서 부단히 자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극복해나가는 존재를 "위버멘쉬" 라고 부른다. 니체의 허무주의의 극복은 이러한 위버멘쉬적 인간됨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3. 자연주의

     니체 철학은 자연주의적 생물학주의적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힘에의 의지이다. 힘에의 의지는 인간의 본능이며, 이것이 가치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존의 도덕적 원리와 기독교적 도덕은 약자의 도덕으로 옳지 않다. 약자의 도덕은 반 자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 한다.

     위버멘쉬는 끊임없이 한계에 직면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는 사람이다. 위버멘쉬는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니체는 위버멘쉬가 되도록 도달하는 그 과정에서 인간의 참된 의미를 본다. 인간 정신은 비유적으로 순응하는 낙타 - 저항하는 사자 - 완전히 새로운 단계인 어린아이의 단계로 변신한다. 


4. 긍정과 사랑

     니체는 자연스러운 인간을 공격적이고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진짜 강자는 여유가 있고 베풀수 있고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집중한 것이다. 니체의 철학은 수미일관해 삶에의 긍정을 주장한다. 삶의 긍정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자 사랑을 의미한다. 자신을 사랑해야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힘이 많아지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동정심에 기반한 사랑은 수치심을 줄 뿐이다. 진정한 강자의 사랑은 미움도, 편견도, 아쉬움도 없는 사랑이다. 


5. 엘리트주의

     니체의 철학은 얼핏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고, 강자의 지배를 당연시 함으로서 엘리트 주의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은 모든 사람이 위버멘쉬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며, 약자도 강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현실의 양태는 평등하지 않음을 인정하지만, 잠재적으로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식의 고착적 엘리트주의와는 차별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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